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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Apr 25. 2021

흘려보내기 위해 붙잡아두기

[단비글] '일기'

잊기 위해 일기를 쓴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삶을 살면서도 이따금씩 기쁘거나 슬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일기를 쓰진 않았다. 펜을 들고 일기장을 펼치는 순간은 주로 화나거나 슬플 때, 온갖 고민으로 머리속이 어지러울 때였다. 넘치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꾹꾹 눌러 적다보면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내게 일기는 배설이다. 그곳엔 내 밑바닥에 있는 어두운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감정에 예민한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감정에 잡아먹힌다. 나는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면 며칠씩 몸살을 앓는다. 의문의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하고 물만 마시고 체하기도 한다. 감정 기복도 심한지라 우울감은 갑작스레 스물스물 올라온다. 그럴 때면 관계를 차단하고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 친구들은 내가 잠적하는 시기를 계절에 상관없이 '겨울잠'이라고 불렀다. 두세달에 한 번씩 겨울잠을 잤다.


학부 3학년을 마칠 무렵 긴 겨울잠을 잤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경미한 어지럼증으로 병원에 가셨는데 주사를 잘못 놓는 바람에 쇼크가 왔다. 마지막 인사조차 못 하고 갑자기 떠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나 생신 때에도 잘 찾아뵙지 못했다. 전화라도 자주 할 걸 뒤늦게 후회만 남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다.


진로에 관한 고민도 버거웠다. 3년이나 대학을 다녔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었다. 동기들은 방학을 앞두고 대외활동이며 인턴이며 미래를 위한 활동에 여념이 없는데 나는 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친구들의 공모전 수상이나 인턴 합격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다. 부러움과 열등감이 스쳤다.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종강과 함께 교내 언론고시반 입반 시험을 봤다. 계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글과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기자가 그에 부합하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했다. 담당 교수님과 1대 1로 이뤄진 면접에서 혹평을 들었다. 교수님은 내가 너무 우울해 보인다며 기자를 할 만한 깜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눈물이 왈칵 났다. 그의 날카로운 말보다 그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는 나에게 화가 났다.


방학 내내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하루에 18시간씩 잠을 잤다. 일주일에서 보름이면 끝나던 겨울잠은 두달이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결국 휴학을 했다. 봄이 오고 다시 기운을 차려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산책을 하러 밖에 나가는 것도 엄두가 안 났고 2시간 짜리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도 지루하게 느껴졌다. 독서는 시도조차 못 했다.


그나마 만만한 게 일기였다. 타인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품이 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 털어놨다. 주술이 맞지 않는 문장을 아무렇게나 썼다. 썼던 얘기를 쓰고 또 썼다. 좌절과 한탄을 일기장에 다 쏟아내고 나면 아주 미묘하게 기분이 나아졌다. 되는대로 일기를 쓴지 보름이 지나고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18시간씩 자던 잠을 10시간 정도로 줄였다. 드라마와 영화를 찾아 보고 집 근처 카페에서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책도 읽었다. 그러고는 영상이나 책을 본 소감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일기장에 썼다. 다섯 달쯤 지나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미뤄뒀던 지인들과의 만남을 퀘스트 깨듯 성사시키느라 꽤나 분주한 한 달을 보냈다. 


그때부터 순간순간 일기를 쓴다. 마음 먹고 몇 장씩 일기장을 채울 때도 있지만 스케쥴러 빈 공간에 짧게 쓸 때가 더 많다. 펜을 들기도 귀찮다 싶으면 핸드폰이나 노트북 메모장에 주저리주저리 쓴다. 그것조차 하기 싫을 땐 녹음을 한다. 핸드폰 음성 메모장에는 3~4분 짜리 파일이 가득하다. 사람들에게 느끼는 서운함, 내 능력 부족에 대한 속상함, 지난 날에 대한 아쉬움 등 혼자 실컷 떠들고 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해진다. 켜켜이 쌓이기 전에 덜어냄으로써 삶은 계속된다. 일기는 우울이 나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최후 방어선이다. 나는 오늘도 잊기 위해, 살기 위해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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