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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Apr 26. 2021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단비글] '일기'

브런치를 돌아다니다보면 자신의 글이 에세이가 아닌 일기일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글을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다. 글쟁이들, 그러니까 좋은 글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에세이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반면, 일기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개인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가장 보편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는 삶과 죽음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인물은 자신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먹고 싸고, 또 먹고 또 싸고.” 우리의 인생을 요약하자면 ‘그는 살다가 죽었다’가 될 것이다. 조금 더 비참한 인생이라면 ‘그는 태어나서 사랑했으나 사랑받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한 채로 죽었다’ 정도일 것이다. 인생은 보편적인 관점에서 다 비슷비슷하다.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또 얼마나 비슷한지. 우리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사랑을 나눠줄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행동이 얼마나 정의로운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세상의 이야기들을 큰 주제로 묶자면 열 손가락 안에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성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디테일이다. 디테일은 개인의 일기장에서 나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나는 실망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쓴 일기를 보면서 당시 나는 실망하기보다는 분노하고 질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떨어진 사실보다는 당선된 친구를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친구의 어깨는 한껏 올라가 있고, 목소리는 과하게 경쾌하다. 친구는 당선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친구를 보고 나라면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한층 더 겸손했을 거라는 말이다. 저런 얄팍한 애를 뽑다니, 반 친구들의 수준을 의심한다.


내 일기는 ‘반장 선거에서 떨어져 슬펐다’로 요약되지만, 이렇게 썼다면 아무런 재미도 교훈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슬픔은 당선된 친구들에게 투사된다. 나는 친구들을 왜곡해서 본다. 내 일기는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가 어려서부터 속물이었음을 드러낸다. 비슷한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일기를 포함한 모든 글은 글을 쓴 사람의 세계관 그 자체다. 그래서 모든 글은 주관적이다. 글로 구축된 세상은 쓰는 사람의 주관으로 왜곡된다. 객관성과 보편성도 허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보편성을 담은 에세이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기보다 더 낫다는 말할 수 있을까? 이 둘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다만, ‘좋은 글’이 존재할 뿐이다.


좋은 글은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글이다. 글쟁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글이란 없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사실이다. 좋은 ‘메시지’를 담은 글은 이미 누군가가 썼다. 우리는 옳은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창의성 없는 인류다. 하지만 좋은 메시지를 담는 ‘방식’은 앞으로 글을 쓸 사람에 달려있다. 삶의 디테일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글을 만들어낼 것이다. 어쩌면 가장 일기 같은 글이 가장 독창적이고 의미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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