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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Apr 02. 2021

나를 비추는 거울, 일기

[단비글] ‘일기’

스무 살 때 일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시간이 많던 시절. 밤에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던 날들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날에는 늦게까지 친구와 연락하거나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불을 켜둔 채로 잠든 날도 많다. 어느 날, 일기를 쓰다 잠깐 누웠는데 일어나보니 아침이었다. 책상을 보니 일기장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누군가 읽은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한동안 계속됐다. 엄마가 일기장을 읽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신 것 같았다. 불을 켜고 일기장을 펴둔 채 잠든 내 행동의 대가는 컸다.

      

누군가 본다는 것을 의식하니 일기가 쓰기 싫어졌다. 일기장을 침대 밑에 숨겨 놓거나 책상 아래 안 보이는 곳에 숨겨두는 등 여러 방법으로 감춰두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아 그날 이후 일기를 쓸 때마다 자기 검열이 심해졌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좋아서 때로는 연필을, 때로는 펜을 손에 쥐고 무슨 글이든 종이 위에 직접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일기만은 예외가 됐다. 내게는 두 개의 일기장이 있다. 하나는 종이로 된 일기장이고,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 일기장이다. 펜으로 적는 일기는 건조한 기록문에 가깝다. 감정은 최대한 빼고 담담하게 쓰려고 한다. 어떤 날의 일기는 마치 작업일지를 적은 것 같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무언가 마음속 깊은 고민이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일기를 쓴다. 스마트폰에 적는 일기는 내가 겪은 일과 감정들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쓴 글에 가깝다. 때로는 산문으로, 때로는 시로 적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취업 준비를 위해 독서실을 꾸준히 다녔다. 늦은 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사는 게 외로워서 적은 일기가 있다. 지금 읽어보면 왜 그렇게 그때 움츠러들고 자신감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온갖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시처럼 적은 그날 일기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감정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로 일기를 쓰면 언어도 그걸 다 감당하지 못해서 며칠 지나 그 글을 읽어보면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래도 나는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건이나 현상을 언어로 기록하면 내 머리와 마음에 맴도는 감정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기록은 오래도록 남아서 그날의 나 자신과 기억을 객관화해서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기를 쓸 때는 마음을 내려놓고 솔직한 언어로 쓰려고 노력한다. 꾸밈없이 편하게 쓴다. 일기를 쓰면서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날 무엇을 했고 무엇을 봤는지도 적지만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쓰려고 애쓴다.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해보려고 노력한다. 

     

어릴 적 숙제의 다른 말이었던 일기. 일기를 숙제처럼 쓰고 싶진 않아 의무감을 가지고 매일 쓰지는 않는다. 기쁜 날보단 마음이 힘들고 지친 날에 일기를 적는 편이라 일기장을 펼쳐보면 물기가 잔뜩 배어 있거나 우울로 점철된 글이 많다. 하루하루 내 감정과 생각들이 차곡차곡 모이다 보면 그것이 쌓여 내 삶을 성숙하게 하리라 믿는다.  

   

무언가를 적는다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같다. 특별한 하루도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증발해버리고는 한다. 반대로 기록하는 순간 평범한 하루가 특별해진다. 일기를 쓰고 몇 달 뒤, 몇 년 뒤 읽어보면 그날의 내가 사뭇 새롭게 느껴진다. 지난날의 추억과 감정에 웃기도 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기도 한다. 일기는 내 생각을 다듬고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책은 특별한 사람이 쓰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 일기. 일기를 쓰는 그 사람이 바로 작가다. 일기에는 소중한 과거의 감정과 생각, 지난날의 추억이 모여 있다. 일기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를 잘 알아야 이웃을 볼 수 있고, 세상을 볼 수 있다. 나를 아는 데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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