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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May 15. 2021

발 없는 새

[단비글] '발자국' ③


영화 <아비정전>에서 주인공 아비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만나러 필리핀으로 간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길 거부한다. 아비는 어머니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카메라 렌즈는 아비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의 발걸음은 고집스럽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이 이렇게 다짐한다.

     

“단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싫으시다면 나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     


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세저리)을 오기 전에 장국영이 연기한 아비의 뒷모습을 자주 떠올렸다. 취업하기 위해 또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을 떠나는 내 모습이 아비의 뒷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아, 쓸데없이 비장했다.)      


엄마에게 얼굴을 영원히 보여주지 않겠다는 다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비는 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양어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의 부재’는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아비는 손쉽게 사랑하고, 손쉽게 사랑하는 사람을 버린다. 그에게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장만옥을 내팽개치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거다. 아니, 사랑이 뭐라고, 모든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과 시까지도 사랑 타령이란 말인가! 공주와 왕자의 사랑만 말하는 게 아니다. <겨울왕국>, <코코>, <토이스토리>도 모두 사랑 타령이다.  




예전에 나는 사랑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는 일을 귀찮아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러나 작년 1년 동안 진짜 혼자가 된 후에 깨달았다. 혼자는 견딜 수 없이 비참하다는 걸 말이다.      


항상 시선이 무서웠다. 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들이 늘어날수록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n개의 시선이 존재한다면 (n명은 독립된 존재이기에) 나의 정체성은 1/n로 쪼개진다. n이 무한대에 가까워진다면 나의 정체성은 ‘0’에 수렴하게 된다. 나는 세상과 관계를 맺을수록 내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계 맺기 보다는 혼자를 택했다. 그러나 혼자가 되면서 세상의 시선이 ‘0'이 되고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수학은 분모가 ’0‘인 숫자는 아예 정의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얼마 전 히키코모리를 취재하는 친구와 밥을 먹다가 혼자 취업준비를 하던 때 얘기가 나왔다. 취준을 하다 세저리에 들어온 우리들의 기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과 독서실을 왔다 갔다 하며 기자를 준비했다. 골방에 쓸쓸히 앉아 성공할 날을 꿈꾼 것이다. 친구는 히키코모리 전문가의 말을 전했다. “요즘 청년들은 갈수록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히키코모리가 될 위기에 처해있다네.”      


내 주변에 기자 지망생이 아니어도 취준하던 친구들의 사정은 비슷했다. 우리는 성공이라고 부르기엔 거창한 취업을 꿈꾸며 일상에 등을 돌렸다. 대학 마지막 학기에 나는 친구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가끔 마주쳐도 눈인사만 할 뿐이었다.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이 집이 아닌 친구들은 서울에서 방을 구해 대학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뒤돌아선 친구들의 모습에 아비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짐 자무쉬의 영화 제목이다. 이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비가 옆에 있는 연인과 친구를 뒤로 하고 필리핀으로 찾아간 이유는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그도 세상의 시선이 ‘0’이 되는 건 견딜 수 없던 거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시선을 마주하러 떠났던 것이다. 살기 위해선 시선이 필요하다.     


세저리 첫 주에 교수님과 밥을 먹었다. 교수님은 이곳을 ‘정신병동’에 비유했다. 세상에 버림받아 미쳐버리기 직전인 애들이 오는 곳이 세저리라는 비유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크게 감동했다. 우리가 미쳐버리기 직전이란 사실을 알아줬기 때문일까?

  

나는 요즘 세저리 생활을 하면서 자꾸 영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를 떠올린다. 정신병동 환자들의 연대가 이상하게도 따뜻하게만 느껴진 영화다. 정신병동은 사회가 배제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문명사회는 시선에 걸리는 이들을 정신병동에 보내는 방식으로 세상을 정화(?)했다. 정신병동은 시선, 그러니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합체다.(어쩌면 미쳐서 들어간 게 아니라 들아 간 뒤 미쳐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시선을 주고받는 정신병동은 더 이상 정신병동이 아니다. 이들은 함께함으로써 탈출을 도모하고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게 된다.  

      

영화 <아비정전> 속 ‘발 없는 새’는 평생 하늘을 떠돌다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앉는 순간 바로 죽는다. 그런데 발 없는 새가 똑같이 발 없는 새들이 있는 곳에 떨어졌어도 바로 죽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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