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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May 24. 2021

설국 여행

[단비글] '발자국' ⑤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에 혼자 영화를 틀었다. 영화에 곁들일 술과 안주를 찾았지만 냉장고는 비어 있었다. 배달도 눈보라에 막혀 모두 문을 닫았다. 하는 수 없이 잠옷위에 긴 외투를 걸쳤다. 아무도 없는 빌라 계단에는 따박 따박 내 슬리퍼 끄는 소리만 들렸다. 3층에 4동, 2층에 5동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공동 현관이 열리고 칼바람이 마중 나왔다. 파르르 떨고 나서야 새하얀 밤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는 낯선 골목길, 대학 자취촌은 설국이 됐다.


골목길 위로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들을 따라 인도와 차도가 나뉘지 않은 길로 나왔다. 가운데엔 거북이처럼 지나간 자동차들이 느릿느릿 그어 놓은 선이 있었다. 그 선을 경계로 행인들이 발자국을 찍어 놨다. 바퀴자국에 눈이 밀려나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서 납작해진 눈은 미끄럽게 얼어붙었다. 미끄러질까 봐 앞사람들의 발자국 언저리를 밟았다. 새 발자국이 생겼고, 눈이 내려 그 전 발자국을 채웠다.


편의점에서 나왔을 때 멀리서 내려오는 행인을 봤다. 내가 걸었던 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 발자국을 신경 쓰고 있었다. 다시 발자국이 남으며 미끄럽지 않은 곳에 표식을 남겼다. 그 사람이 내려온 발자국을 밟으며 올라갔다. 나와 그 사람, 그 전에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뒤 사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녘 대학 자취촌 사람들은 발자국으로 서로를 보호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평소라면 사람들은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아스팔트는 사람들의 발이 누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뒤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굳이 신경 쓰지도 않는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어 사람과 기계가 뒤섞여 다니는 골목에서 그저 자기 길만 걸어갈 뿐이다. 그러곤 혼자 발자국 소리를 내며 원룸으로 들어간다. 내려온 설국은 그렇게 단절된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연결시켰다.


잠든 사이 재설차가 염화 칼슘을 뿌렸다. 하얀 눈길은 금세 흙빛 덩어리로 변했다. 덩어리들은 햇볕에 녹아 흩어졌고 검은색 아스팔트가 드러났다. 그 위를 사람들이 밟으며 지나갔다. 단단한 아스팔트 위에 발자국은 없었다. 배달 오토바이들이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갓길에 바짝 붙었다. 앞에서 차가 와도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새벽에 본 것은 꿈이었을까? 자취방으로 들어가며 어렴풋이 떠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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