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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May 30. 2021

하여튼 발자국 찍을 것만 생각하지

[단비글] '발자국'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난 새로 쌓인 눈을 밟는 걸 좋아했다.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그때 내가 매번 했던 말은 기억난다. “인류의 첫 발자국!” 새로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내 조그만 발자국만 남은 걸 보면서, 뭔가 해낸 것 같고 내 흔적을 남긴 뿌듯함에 계속 화단 위로, 도로 위로 새로 쌓인 눈만 찾아다녔다. 소소한 정복욕을 해소한 것이다.


그즈음 나는 위인전 전집을 독파하고 있었다. 아마 닐 암스트롱의 위인전을 보고 깊게 감명 받았던 것 같다. 그 어떤 사람도 밟아보지 못한 달 표면을 디뎌 자신의 발자국을 영원히 남긴 일화는 어른이 들어도 대단한 거였으니, 초등학교도 가지 못한 어린 아이한테는 무척 훌륭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암스트롱이 성조기를 달에 꽂으며 남긴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은 많은 이들이 명언으로 꼽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 섬뜩하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달에 발을 디디고 깃발을 꽂는 게 어릴 땐 멋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오만해 보인다. 순백의 눈밭 위에 내 발자국을 남겨 소소한 정복욕을 해소했던 나처럼, 달을 시작으로 더 많은 자연과 땅을 정복하겠다는 지극히 미국적인 의사 표현이기 때문이다.


▲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찍은 발자국. ⓒ NASA


얼마 전 미국 시간으로 4월 25일, 나사는 화성탐사 드론 인제뉴어티(Ingenuity․독창성)가 세 번째 화성 시험 비행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얘기였다. 아직 화성을 밟은 인간은 없지만, 나사의 말대로 차근차근 계획대로 진행되다 보면 가까운 시일 내에 인류가 화성을 ‘정복’할 지도 모른다. 이상 기후로 망가지고 있는 지구를 떠나 인류가 새로 정착할 수 있는 땅을 마련할 수 있다며 흥분한 채 기사를 쓴 미국 기자도 있다. 달에 새겨진 발자국 뿐 아니라 화성에도 거대하고 새로운 도약의 발자국을 새길지도 모른다면서. 오염된 지구를 벗어나 인류가 출발할 수 있는 그 시작일지도 모른다면서.


그러나 나사를 포함해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남긴 그 무엇보다 거대하고 대단한 발자국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 그냥 도약 수준이 아니라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 모든 생물의 삶을 바꾼 발자국, ‘탄소 발자국’ 말이다. 탄소 발자국은 개개인이나 기업, 국가 등이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내는 온실 가스의 총량을 말한다.


2019년에 탄소배출량 1위 자리를 중국에게 넘겨주기는 했지만, 그동안 부동의 1위는 미국이었다. 1인당 배출량으로 따지면 인구가 적은 사우디 다음 2위다. 지금까지 배출한 탄소 총량만 따지면 미국이 1위다. 발자국은 도약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화성이니 뭐니 새로 발자국을 찍으려 하지 말고 찍어온 발자국을 돌아보고, 지구 환경에 남긴 상처에 책임을 지고, 탄소발자국을 줄이면 좋겠다. 아, 참고로 한국은 1인당 탄소 배출량 4위다. 한국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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