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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Jul 04. 2021

밤에 쓴 추억은 아침에 찢으며 절정에 달한다

[단비글] '밤'

가족과 제주도로 여행온 첫째 날 밤, 창밖을 보며 15년 전 가족 제주 여행을 떠올렸다. 15년 전 초등학생 때 제주도에 왔을 때는 첫날부터 태풍 때문에 하루를 숙소에서 보냈다. 미니랜드에 갔을 때는 비바람에도 우비 입고 웃으면서 브이자를 그렸다. 시에는 최신 모델이었던 디지털카메라로 나와 동생을 찍었던 엄마의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아빠는 그 뒤에서 행복하지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른 실내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비바람에 습하고 찝찝해도 기분은 좋기만 했다.


15년이 지나고 아빠 퇴임 기념으로 온 여행. 엄마와 아빠는 여행 일정을 위한 얘기만 할 뿐, 개인적인 이야기는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나와 동생은 예전처럼 떼쓰지 않고 '사회생활'을 부모님께 할 수 있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수 분을 즐겁게 떠들다 찾아오는 숨막히는 정적. 여행 나흘 동안 가족 이 다같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15년 사이에 제주도는 많이 바뀌었다. 우리 가족 사이는 더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숙소 창 너머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검은 하늘에 나는 15년 전 추억에 젖어들었다.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지치지 않았던 때, 순수한 즐거움을 맘껏 누리던 때. 서울과 달리 쏟아질 것 같이 많은 별만 봐도 마냥 행복했던 때. 어깨에 진 무게보다 가족에게 얻는 에너지가 더 컸던 때. 그러다 문득, '어두운 밤'이 궁금해졌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새삼스러워질 때. 왜 밤하늘은 어두운 걸까? 별이 많이 보이는 날에는 많이 보인다는 변화에 신기해하긴 했지만 빛나는 별과 달을 받쳐주는 어두운 밤하늘은 그러려니 했는데. 15년 전도 지금도 어두운 밤하늘이 궁금해졌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천문학자 허블은 우주가 무한하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밤하늘이 어둡게 보이는 거라 했다. 우주의 수많은 항성들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멀어지고 있는 항성의 빛은 지구에 영원히 닿을 수 없다. 사람을 감정에 푹 빠지게 하는 어두운 밤은 도달 불가능한 광선의 결과다. 밤하늘은 끝없이 어두울 것이다.


무엇을 썼는지 왜 써야만 했는지 나는 지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어떤 일에 한 가닥 잡념도 없이
몰두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은 그렇게 열중해서 쓴 편지를
그 다음날 아침에 찢어버리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 신달자,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못한다>


내가 15년 전을 떠올렸듯, 밤은 추억을 온전히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다. 영원히 어두울 밤, 모든 게 고요히 잠든 밤에 오롯이 내 감정으로 쓴 추억은 다음날 아침에 찢어버림으로써 완성된다. 아무리 떠올려봤자 추억은 추억이고, 과거에 머물러야 아름다운 것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오지 않을 빛 한 줄기를 기다리며 밤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아침의 밝은 햇빛을 즐길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15년 전을 아무리 그리워해봤자 그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그때처럼 될 수도 없다.


핸드폰을 들어 오늘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봤다. 15년 전을 그리워한 것처럼, 10년 뒤, 20년 뒤에는 지금을 그리워할지 모른다. 그때도 오늘처럼 씁쓸함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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