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후 자유시간이 많아지며 아니, 나의 모든 시간이 자유로워지면서 되려 절제하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흘러넘치는 자유에 허우적거리며 막살다가는 내 몸도 마음도 축난다는 것을 2년간 충분히 체험한 결과다. 뒤죽박죽인 낮과 밤, 불규칙한 수면 시간, 과도한 TV 시청과 핸드폰 중독, 기분 따라 먹는 끼니, 흥에 겨운 음주 등과 굿바이하고 이제 통제 가능한 나만의 룰들이 만들어졌다. 실은 나도 신기하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올해의 절반 정도가 지나가던 날, 노트에 이렇게 쓰고도 신기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때 바리스타를 꿈꿨을 정도로 커피를 사랑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빵순이 기도 했다. 직장에서도 하루 2~3잔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 집에만 있으면서 캡슐 머신으로도 모자라 한동안은 여유로움을 만끽한답시고 핸드 드립도 열심히 했다. 커피를 물처럼 마셨던 것 같다. 약도 커피에 먹었으니까.
혼자 사는 사람의 끼니 해결이 간단할 것 같지만, 한없이 고단한 일이다. 그 식단을 망치려는 무수히 많은 나, 나, 나들과 싸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빵과 커피, 배달앱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편리함. 가볍게(?) 한 끼를 때운다면서 혼술까지 더해져 엉망진창이었던 나날들.
올해가 시작되면서 커피를 하루 1잔으로 제한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의존하던 커피를 안 마신다고 죽을 것 같진 않더라. 단 한 번의 기회를 음미할 시간과 장소, 커피 메뉴를 신중히 고른 후 마시는 커피는 더 소중하고 그 맛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물처럼 마신 그 자리는 다른 것들로 대체되었다. 레몬을 띄운 생수, 작두콩차, 페퍼민트나 카모마일 같은 허브티들.
밀가루를 제한한지는 한 달 정도가 지났다. 안 먹어 버릇하니 빵이 먹고 싶어 미치겠다거나 과자 금단 현상이 생긴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앉은자리에서 새우깡 한 봉지를 탈탈 털어먹던 날, 글라스락에 담은 열몇 개의 새우깡이 아직도 주방 쪽 눈이 잘 가는 자리에 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아무렇지 않게 밀가루 끊기를 시작했고, 그 새우깡을 화석처럼 바라보며 밀가루에 대한 내 생각을 계속 리플레이 중이다. 물론 100% 제한은 아니다. 주중에 잘 지킨 나를 칭찬하기 위해 주말에 통밀빵에 크림치즈를 발라먹기도 한다. 다만 무절제하게 집어 먹고 습관적으로 폭식하던 밀가루를 그저 더 멀리, 서먹서먹한 관계로 두는 셈이다. 놀랍게도 그 벌어진 사이만큼 피부는 더 고와지고, 몸은 더 가벼워지는 걸 느끼니 이 좋은 걸 그만둘 수가 없는 거다.
밀가루 외에도 먹을 것은 많다. 하루에 두 끼 정도 챙겨 먹는 편인데, 각종 야채를 전자레인지에 쪄서 먹기도 하고 오트밀 죽이 너무 맛있어서 끼니로 애용한다. 밥을 지을 땐 쌀과 현미를 1:1로 섞는 게 입맛에 맞다. 최근에 자주 만들어 냉장고에 쟁여두는 반찬은 ‘당근 라페’이다. 삶은 닭가슴살이나 모든 샐러드에 곁들여도 최고다. SNS에서 새로 알게 된 ‘템페’를 먹기 시작해 여러 조리 방법을 시도해 보고 있다. 인도네시아식으로 콩을 발효한 식품인데, 나또를 잘 먹는 내게 치즈처럼 시큼하기도 하고 모양도 예쁜 템페는 일단 첫인상 합격! 국산 약콩으로 만들었다는 비건 마요네즈 한 통을 다 먹은 후 채식에도 관심이 생겨 소소하게 인기 있는 비건 식당도 하나씩 다녀보려 한다.
알레르기가 있는 ‘메밀’만 제외하면, 나는 가리는 것 없이 모두 잘 먹는다. (그러므로 평양냉면은 통일이 되어 진짜 옥류관에 간대도 못 먹는다.) 새로운 식재료나 조리법에 관심이 많고, 안 먹어본 것에 대한 모험을 즐긴다. 더불어 일상적인 음식에 특정한 와인이나 전통주를 페어링 하는 것에도 호기심이 많고, 그렇게 머릿속 상상한 조합으로 메뉴를 짜는 것도 재미있다. 작년 겨울 술을 마시고 발이 약간 다쳤던 사건 이후로 술 취하지 말자는 다짐을 잘 지켜가고 있다. 분위기에 휩쓸려 무리하지 말고, 맛있게 적당히 즐기자가 나와의 약속이다. 식사 만남이 따로 없다면 나는 매일 ‘1인분의 삶’을 잘 차려가고 있다.
I am what I eat.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
내 입으로 들어와 삼킨 것이 내 몸을 이룬다. 그 몸이 내 삶의 가장 기본이다. 건강한 몸을 위한 일상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다음 날 출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일찍 잠들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가급적 모닝 페이지를 쓰며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날의 일정을 계획하고 나를 위한 작은 즐거움도 중간중간 챙겨 둔다. 외출 상황과 식사 시간, 운동가는 요일을 적절히 배치하며 몸이 무리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쓴다.
생각해 보면, 퇴사 직후부터 내가 몸의 솔직함에 집중한 게 맞는 것 같다. 그즈음 시작한 화장품 다이어트부터. ‘여자가 나이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지’ ‘여자는 예의상 화장 정도는 해야 돼’ 같은 고정관념을 스스로 와르르 무너뜨리면서 이런 시도가 가능했다. 도드라지는 주근깨도 가리려 애쓰지 않고, 나만의 개성으로 받아들이며 마음이 편해졌다. 기초 제품 정도만 바르다 보니 성분을 꼼꼼히 따져보고 단계를 최소화했다. 낮에는 물로만 세안한 뒤 무기 자외선 차단제 위에 볼터치만 살짝, 밤에는 링클 에센스를 목까지 꼭 챙겨 바르는 정도. 립&아이 리무버 1개로 얼굴 전체를 클렌징하고 역시 물 세안하는 편이다. ‘디렉터 파이’ 피현정 님의 생생 정보를 참고해 애정 하며 잘 써온 브랜드는 랩노, 아토팜 리얼 베리어, 일리윤 등이다.
퇴사를 하고 나서 배운 게 참 많지만 그중에서 꾸준히 제일 오래 하고 있는 것은 필라테스다. 수영도 무서워 포기하고, 플라잉 요가나 재즈 댄스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죽으나 사나 필라테스 하러 가는 이유가 있다. 운동 끝나고 나오는 길에 정수리 꼭대기부터 목, 어깨, 등, 하체에서 발바닥 끝까지 몸이 일자로 쭈욱 정렬되는 그 느낌이 정말 상쾌하다. 2년이 넘었으니 어느덧 몸 구석구석 자리 잡힌 미세한(?) 근육도 느껴진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다. 퇴사 전 보다 나는 더 나이 들었지만, 내 얼굴과 몸은 분명 더 솔직해지고 튼튼해졌다.
‘인생 2막’을 시작한다고 생각했을 때 새하얀 도화지처럼 새로운 바탕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몸은 이제껏 살아온 40여 년의 쓰임새만큼 낡고 닳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평균 수명을 고려해 딱 그 시간만큼을 더 산다고 가정하면, 바로 지금이 내 육신을 더욱 돌보아야 할 때이다. 나를 잘 먹이고 챙기며 내 기준으로 맵시 나게 가꿔야, 2막을 열연할 아름다운 배우로 설 수 있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 더블 캐스팅은 없다. 오늘도 나는 묵묵히 1인분의 식탁을 차리고, 내 몸을 다독거리며 무대 위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 당근 라페 레시피
1) 당근을 채 썰어 전자레인지에 1~2분 돌려준다.
2) 한 김 식힌 당근을 면포 등으로 꼭 짜서 물기를 제거한다.
3) 올리브 오일, 꿀(올리고당), 레몬즙(식초), 후추, 다진 마늘(기호에 따라)을 당근과 함께 버무린다.
4) 냉장고에 하루 정도 저장해 두었다 차갑게 먹는다. (1주일 정도 보관해도 괜찮지만 냉장고 성능에 따라 다를지도)
+ 오트밀 죽 레시피
1) 오트밀 1인분에 두유 한 팩, 흰 우유 약간, 시나몬 파우더를 마구마구 뿌린 후 전자레인지에 2분 돌려준다.
2) 잘게 썬 사과, 견과류, 크랜베리 등을 넣어 섞는다. (바나나 1개까지 넣는다면 다음 끼니는 간소하게 먹기를)
3) 이렇게 먹어도 꿀맛이지만, 더 달게 먹고 싶다면 메이플 시럽이 궁합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