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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Apr 07. 2020

87 - 식목일 아침의 다짐

퇴사 3주년을 축하하며


4월 5일. 식목일보다 내게 더 의미 있는 날.

3년 전 회사를 나온 날이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매년 돌아오는 입사일마다 혼자서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회사탈출하고 나니 또 퇴사일마다 나를 점검하게 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나 나에게만 특별한 퇴사일.


3년 전 그날의 날, 지금의 나... 어떻게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꾸준히 나의 브런치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서는 또 퇴사 얘기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아마 지긋지긋할 수도 있다, 퇴사 얘기 워낙 많이 해서. 나의 첫 브런치북의 주제이기도 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onodrama

어쩔 수 없다. 너무 길게 한 회사를 다녔던 삶과, 퇴사 후 지금의 삶이 정말 다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얘기는 계속된다. 부디 지겨워도 노여워 마시길 :)





아침마다 핸드 드립 커피를 내리는데 원두가 떨어진 지 며칠 되었다. 잔고가 풍성할 때는 고급 원두도 고민 없이 결제하고 심지어 먹다 남아 오래된 원두는 버리기도 했다. 바짝 절약하며 지내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원두를 사기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늘려본다. 다른 차나 두유를 데워보며 대체 음료를 찾고, 가성비 가심비 좋은 원두 검색에 가격 비교도 계속된다. 나쁘지 않다. 새 원두를 바로바로 채워 넣기보다, 참 드립 커피를 그리워할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원두가 없는 오늘 아침, 핸드 드립을 했다. 냉동실에서 꼭꼭 숨어있던 원두를 찾았다. 한 1년도 더 된 것 같다. 동생이 베트남에서였나 사 온 것을 소분해서 저장해 둔 것. 큰 기대 없이 향이라도 맡을까 해서 커피를 내려본다. 일단 향은 괜찮았다. 맛은 당연히 최상일 리 없지만, 일부 맛없는 커피 체인점에서 느꼈던 특징 없는 아메리카노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다.


냉동되어 있던 차가운 원두를 뜨거운 커피로 만들어 본 경험, 새롭다.



마침 오늘의 일력 성경 말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I know your deeds, that you are neither cold nor hot. I wish you were either one or the other!”

(요한계시록 3:15)



오후에는 아님 내일에는, 이 원두를 가지고 아이스커피를 내려볼까 한다. 퇴사자로 살아온 3년, 나는 어쩌면 냉동실에서 쉬고 있던 원두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차갑게든 뜨겁게든, 나는 나를 변주할 준비를 마쳤다. 최고의 맛이 못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다. 가만히 보관되어 있는 게 아니라, 기어코 흔들어 깨고 나와서 무엇으로든 행동하는 사람.

식목일 아침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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