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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Apr 11. 2020

90 - 황금빛 커피의 마법


본가에 가면 부모님과 밥상을 물린 후 ‘의식처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커피를 타는 일. 어느 집이든 식사 후 루틴이 있는지 모르겠다.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마신다던가, 과일을 씻어 후식으로 먹는다던가. 우리집은 빈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가면서 곧장 물부터 끓인다.


엄마가 음식 준비로 기운을 뺐으니, 커피 당번은 당연히 아빠 아니면 나. 오랜만에 집에 간 딸이 커피라도 타야 할 것 같아 주로 내가 나서는 편이다. 뭐 전혀 어렵지 않다. 핸드 드립처럼 과정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봉지 뜯어 물만 붓고 휘휘 저어주면 끝.


그렇다. 울 엄마는 다 아는 그 브랜드 ‘모카 골드’ 애호가다.




몇 살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꼬맹이 때도 식탁 위엔 손잡이에 칸 3개가 붙어있는 통이 있었다. 커피, 프림, 설탕이 각각 담겨있고 엄마는 마법의 주문처럼 항상 ‘둘, 둘, 둘’을 외쳤던 기억이 난다.

사실 원두가 소비되면서 ‘인스턴트’ 커피라는 이름이 붙었지, 그 전까진 그 가루들이 커피의 전부였다. 그러다 환상의 비율로 봉지 ‘믹스’ 커피가 탄생했다. 한 번 마시면 끊어낼 수 없는 신비의 묘약처럼.

‘다방커피’라고도 불렸지만, 나는 거기까진 경험이 없다. 조금 우습겠지만 대학생이 되고 카페에서 처음 시킨 메뉴는 긴 잔에 뭐가 가득 담기다 못해 꼭대기엔 아이스크림과 요상한 우산까지 꽂혀있던 ‘파르페’였다. 아마 엄마가 젊은 시절엔 진짜 다방에서 다방커피를 마셨겠지. 그녀가 좋아하는 그 맛.


나도 나름대로는 믹스커피의 추억이 있다. 입사 후 회사 탕비실을 채우던, 꼭 종이컵에 생수통 온수로 타 마셔야 제맛이던 골드 믹스의 그 달짝지근함. 피곤한 일터에서 몇 안 되는 위로였다. 물론 카페 체인점의 커피도 마셨지만, 그 골드 커피는 다른 세계의 음료였다.  




원두커피가 일상화되고 카페가 이렇게 널려있건만, 엄마의 선택은 오직 골드 믹스다. 밥 먹고 물도 안 마시고 곧장 타야 하는, 기호식품을 넘어 생필품 같은 봉지 커피 되시겠다. 아빠는 원두로 내린 블랙, 카페에서 만든 카라멜 마끼아또도 좋아하지만, 엄마는 일편단심이다. 모녀가 사이좋게 집에서 드립도 하고 원두 맛 구분도 해가며 커피 맛집 찾아다니면 좋겠다만, 그 욕심 버린 지 오래다.   


엄마는 먹는 거에 있어서는 도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메리카노는 한 입 마셔본 뒤로 영원히 패스. 유제품을 잘못 드시고 몇 번 배탈이 난 뒤 라떼류의 음료는 더욱 기피한다. 어쩌다 외식을 하면 아빠랑 내 커피를 카페에서 산 뒤, 집에 가서 골드 믹스를 탄다. 엄마에게만은 가성비 최고에 맛도 최고인 커피.


나는 원두커피를 좋아하면서 원래는 믹스 커피와 멀어졌었다. 내 돈 주고 사놓을 일도 없는데 내 집 주방 서랍 속에는 골드 믹스가 황금처럼 숨어 있다. 몇 박스씩 쟁여두는 엄마 집에서 몇 봉씩 가져다 놓으신 거다. 당신 드실 때 필요하지 않냐며. 엄마용 커피를 요즘 내가 야금야금 뜯어 마시고 있다. 특히 땅콩 샌드 과자를 이 골드 믹스에 찍어 먹는 조합은 환상이다.




아주 가끔, 믹스커피를 한 잔 타 놓고 이상한 생각을 한다. 언젠가 엄마가 내 곁을 떠나면, 해 준 음식도 기억날 테고 잘 드시던 것들을 마주할 때 잠깐씩 힘들어지겠지. 어쩌면 나에겐 그게  황금빛 커피가 될지도 모른다. 한 봉 찢어 달달하게 타 마시면서 엄마를 생각할. 아니 다신 입에 대기 어려울 만큼 엄마를 생각나게 할... 그 커피를 오늘도 마신다. 엄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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