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무 Apr 10. 2020

89 - 아직 비건이 어려운 이유


어떤 음식은 씹어 삼키는 것, 그 이상의 ‘정서’가 된다.

비건과 채식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 여러 정보를 찾고 공부하고 있다. 장을 볼 때도 육류를 장바구니에서 담았다 뺐다 고민한다. 하루 두 끼, 내 밥상에서 최대한 채소를 이용하기 위해 레시피를 짜고 머리도 굴려본다. 골라낸 재료 안에서 맛과 영양까지 신경 써야 하는 요리야말로 창의적인 일 아닌가.


사실 비건 입문자가 봐야 한다는 몇몇 동영상은 아직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식재료에서 이거 저거 다 제거한다 해도, 치즈나 계란을 빼면 내 한끼가 얼마나 초라할지 암담하다(나는 치즈가 좋아서 치즈를 맛보는 수업도 들었던 사람이다). 여하튼 좋다, 다 먹지 않는다고 한번 상상해 보자. 그랬더니 마지막에 도저히 안 되겠는 한 가지가 남았다.


소주  잔에 . 그것도 혼자 먹는. 

나는 그걸 포기하지 못하겠다 아직까지는. 그 느낌, 그 정서가 너무 따뜻하고 위로가 돼서.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내어 준 돼지에게 절하고 싶을 만큼 감사해서. 비건을 ‘지향’하며 플렉시테리언(채식을 하지만 가끔 육류를 허용하는 느슨한 채식)이라도 되자고 다짐하는 이유다.




회사를 다닐 때 사무실 근처에 자주 가던 순댓국집이 있었다. 직장인의 점심 한끼라는 것은 여유롭고 있어 보이는 브런치가 될 수 없다.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김치 한쪽 얹어 떠넘기고 후딱 일어서는 전쟁터 같은 곳. 급한 일이 몰려 점심시간을 넘겨버린 때는 가끔 2~3시쯤 그 집으로 갔다. 언제나 샐러리맨 아저씨들로 가득하던 식당혼자인 내게 피난처가 돼주었다. 잠시나마 뜨거운 국물 한 수저에 노동자의 허덕임과 허기까지 삼켜냈다.


30대 초반 처음 독립을 해서 가져본 나의 첫 원룸. 부모를 떠나 살아보니 그동안 편히 누리던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더라. 매일 나를 먹이는 끼니도 한동안은 열심히 차려보다가 이내 또 만사가 귀찮아지면 적당히 사 먹기도 했다. 집 근처 맛집까지는 아니었고 그냥 24시간 국밥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주말, 점심시간을 피해 혼자서 큰 식탁을 차지하고 순댓국을 시켰다. 몇 숟갈 뜨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외쳤다.

“사장님, 소주 한 병 주세요.”

일순간 내 주변의 공기와 드문드문 앉아있던 테이블의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30대. 여자. 혼자. 나는 그런 걸 다 깨부수며 초록병을 따고 소주 한 잔을 콸콸 따라 보란 듯이 원샷했다. 조금은 느끼하고 잡내 나던 순댓국이 단방에 후련해졌다.


지난 1월, 가장 최근의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덕질을 위해 그 아이의 첫 팬미팅에 다녀온 날. 가기 전과 공연 중의 설렘과 만족도는 최고조에 이르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 그 허탈함과 기묘한 감정. 아마 누군가의 덕후라면 크게 공감할 것이다. 지하철 역까지 가는 버스 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몇십 분을 걸었다. 춥고, 배고프고, 텅 비어버린 마음. 이상하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가 한 군데가 떠올랐다. 손에 꼽는 나만의 순대국밥 맛집. 손님은 뿐이었던 그곳에서 두꺼운 외투를 벗듯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채 뜨끈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혼자서 마주한 순댓국 한 그릇과 소주 한 잔.

내 육체와 영혼을 살리고 채워 준 그 식탁이 귀하다. 어쩌면 나는 완전 채식인이 되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러므로 아주 가끔 먹게 될 때마다 소중한 동물에, 그 음식을 만든 정성에 한 걸음 더 감사하도록 하겠다.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정서’가 이 글로 가 닿았는지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88 - 멜론과 작별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