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벚꽃이 필 때쯤에는 여의도로 모였다. 먼저 회사를 떠나간 언니, 동생들과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얼마간은 나도 차를 마신 후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지만, 퇴사를 한 뒤에는 자유의 몸으로 윤중로를 만끽했다. 퇴사 후 이듬해 어느 봄날, 그날도 퇴사한 언니들과 여의도를 방문했다. 회사에 아직 남아있는 동생을 만나 점심 먹고 카페에 갔다가 직장인은 역시 돌려보냈다.
단골집에서 와플을 챙겨 나오는데 오랜만에 왔다며 쿠키 한 봉지를 선물 받았다. 룰루랄라 쿠키를 들고 자연스럽게 여의도 공원으로 향했다. 일할 때는 점심시간이든 야근 후 깜깜한 밤에도 유일한 탈출구 같던 곳.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고 쉬어가던 곳. 혼자만의, 또 동료들과 이런저런 추억이 많은 곳. 언니들과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사진도 찍고 잡담을 나눴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여서 우리만 있는 것 같았던 공원. 그곳에서 있었던 옛 기억을 하나씩 꺼내다 까르르 웃기도 하고, 아득한 기분에 취하기도 했다.
나는 운 좋게도 여성 직원 비중이 높은 회사에서 일했다. 옆 팀의 존경하던 팀장님을 롤모델로 삼았다. 직장인으로 어른으로서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에 영향받았고, 내게 건네 준 한 마디는 매번 묵직한 울림이 돼주었다. 같은 팀이나 타 팀의 선배와 동료 그리고 후배도 여자들이 많았다. 크게 성차별을 받은 기억이 없다. 최근 몇 년간의 우리 사회와는 꽤 많이 달랐을 십여 년 전, 불합리한 처사나 남자 상사와의 고충을 얘기하는 회사 밖 친구의 이야기도 남의 나라 같았으니까.
혼자 사는 언니, 동생이 많았다. 그들의 집을 방문하고, 그 삶에서 묻어난 충고에 따라 나도 근속 8년 차쯤 엄마네 집에서 탈출했다. 이후에는 나 역시 독립하려는 후배에게 비슷한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업무 스트레스뿐 아니라 연애, 이직(커리어), 재테크, 여행, 결혼, 시댁, 출산, 육아 등등 사소한 것부터 인생의 중요한 문제까지 함께 나누었다. 간혹 이런 관계가 이해되지 않는다던 내 친구는 심지어 회사 언니와 셋이서 만나 함께 수다를 떨기도 했다.
차가 있는 후배와는 근교 여행을 종종 했다. 뚜벅이였던 내가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제천 영화제, 강원도에서 짧게 만든 추억이 소중한 이유는 자연을 벗 삼은 멋진 풍경만큼 아름다운 그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국, 독일, 오스트리아, 프라하, 대만 등 해외여행까지 함께 할 때도 우리는 크게 싸우는 일 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잘 먹고 잘 놀다 왔다. 길바닥에서 아이처럼 여고생 때처럼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인생에 몇이나 될까.
혼자 살 집을 같이 봐준다거나 계약할 때도 함께 해준 사람들.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결혼식 날,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웨딩 마치에 눈물이 차오르던 순간들. 그때마다 여럿이 찍은 단체 사진도 모두 소중하다. 아주 젊고 어린 나도, 적당히 배가 나온 그녀도, 아기를 안고 힘겨워하는 그녀도 거기서 함께 웃고 있기에. 여전히 싱글인 사람도, 또 그렇게 함께 응원하며 (새로운 세계로) 보내진 사람도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이해한다. 우리는 미생으로 만나 함께 나이 들고 더불어 아름답게 성숙해지고 있다. 매일 출근해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계속.
퇴사를 하던 날은 식목일이었는데 비가 퍼붓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조금 일찍 빠져나오려는데, 차를 챙겨 출근한 동생과 동갑내기 동료 친구도 같이 퇴근할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사무실을 뒤로할 때 기분이 좀 묘했다. 에스코트 서비스를 받은 듯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집까지 편안히 왔다. 퇴사를 결심하고 감행하기까지 혼란스러운 시절에 특히 큰 힘이 돼주었던 그녀들. 혼자였다면 울적했을 게 뻔한 그날, 집 앞 술집에서 축배를 들었다. 14년이 넘는 긴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 나의 퇴사를 진심으로 축하받았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그들이 선물한 꽃다발과 화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국 회사가 남겨준 것은, 사람이구나...’
참 좋은 그녀들. 친언니도 여동생도 없는 나지만, 그녀들은 나의 든든한 뒷배경이고 함께 무엇이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라는 건, 나의 과거를 청춘을 오늘까지 기억해주고 예뻤다고 고생 많았었다고 참 잘했다고 이야기해주는. 또 내일의 그 어느 날에도 빛 좋은 공간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쿠키도 나눠먹으며 여전히 나를 바라봐주고 나를 이야기해줄 사람들이다.
감사하다... 는 말로는 부족한 이유다. 내 인생 보물 같은 그녀들에게, 마음 깊은 곳 나의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들의 안녕과 건강을 신에게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