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감상의 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서련 Nov 29. 2021

낯선 이가 두려운, 낯선 존재가 될 수 있는 우리들

방미진 작가 <비누 인간> 리뷰

작가 중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시기와 첫째 아이가 제법 글밥이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기가 맞물리게 되어 나의 (책) 장바구니에는 주로 동화책들이 가득하다. 동화(童話),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해서 우습게 보지 마시라. 김소영 작가님께서 쓰신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말하듯, 그들은 삶의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온전한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인격들이다. 나는 그들의 생동감 넘치는 세계를 여전히 동경한다.

 

나도 그 시기를 지나왔음이 분명한데, 그때의 터질듯한 감정과 마음은 커져버린 몸뚱이에 뭉개져 버렸다. 단짝 친구 삼각관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얼마나 뒤뚱거렸는지, 스티커북에 잔뜩 수집해놓은 스티커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브래지어를 하기 시작한 친구들을 보면서 내 가파른 절벽 가슴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명징한 문장들을 통해 어린이라는 세계, 그 안에서 매일매일 자라는 마음을 슬쩍 보여 주는 동화의 존재는 참으로 소중하다.

 

동화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서 펼쳐지기도 하지만, 어린이 독자의 마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욕망을 화끈하게 실현시켜주기 위하여 크고 작은 환상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 서점 어린이 책 코너에 가서 수많은 동화책들을 한번 둘러보시라. 우리 시대 아이들의 억눌린 욕망을 풀어내기 위해 판타지 장르가 얼마나 열일하고 있는지. 욕망이 실현되는 공간은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환상 세계일 수도 있고, 실제와 환상이 교집합처럼 겹쳐있을 수도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평범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 펼쳐지기 때문에 '혹시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고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픈 방미진 작가님의 <비누 인간>은 바로 이런 동화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이 더욱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옆집에 이사 온 이웃은 어떤 사람일까? 교실에 들어온 전학생은 어떤 사람일까? 어린 시절 누구든 한 번쯤은 해보았을 질문들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사시킨 독자들은 낯선 존재에게 다가가고 싶은 호기심과 거리를 두고 싶은 경계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며 읽는 내내 땀을 삐질삐질 흘리게 된다. 


하지만 너무 걱정만 할 필요는 없다. 공포라는 극단의 심리는 각도를 조금만 돌려보면 말도 안 되는 코미디 같은 상황과도 맞닿아 있기에, 웃음을 자극하는 방미진 작가님의 센스로 중간중간 숨통이 틔이기도 하니까. 


비누 인간,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존재가 한 명도 아니고 다수가 평범한 일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웃집에, 학교에, 마을 가게에, 일터/공장에. 그들은 '인간'으로 스며들기를 바랐지만, 주인공 상남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인간을 수식하는 조건 '비누'에 격렬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비누 같이 하얀 피부색에 대해서, 비누 같이 깎을 수 있는 피부에 대해서, 비누 같이 생긴 비계 덩어리 식량에 대해서, 그들과 우리가 서로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눈덩이 불어나듯 마을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한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마을은 봉쇄되고 외부의 도움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의식이 들기 시작하자 인간의 모습을 한 서로 다른 두 집단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게 된다. 


그들은 우리와 달라요! 사람이 아니라고요! 


이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환상은 섬뜩하리만치 어둡다. 비누 인간이 그들의 하얀 피부를 조각하듯 깎아내서가 아니라, 한 끗차이로 너무나 현실에서 재현될 법한 가능성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비슷비슷한 체구를 지닌 한국. 세계 지도에서 보면 손가락 두 마디만큼 작은 땅에서 또 반을 나눈 '남한'이라는 작은 땅에서 부대끼며 살아갈 때 나는 마을 사람이었다. 나와 다른 존재를 두려워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때에는 그들을 향한 폭력을 조용히 묵인하기도 했다. 내 손이 더러워진 건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해외살이를 하고 있는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나는 이제 비누 인간 같은 정체성이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절대다수가 알 수 없는 문자를 쓸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낸다. 또한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코를 움켜쥘, 냄새가 고약한 신김치와 청국장...... 그리고 번데기도 좋아한다. [피부만큼은 비누 인간 같으면 좋으련만 캘리의 뜨거운 자외선과 건조한 사막 기후 때문에 이것만은 예외다! 흑!]   

다행히 내가 사는 미국은 워낙 다양한 인종이 모여있는 곳이라 폭력을 면하고 일상을 살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유리 벽처럼 세워진 소외와 배제까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종종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혐오와 차별을 보면 이곳에서 소수 인종으로, 여성으로, 엄마로, 어린이로 살아내는 나와 우리 아이들이 마주한 위험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된다.  


'나는 사람이 아닌 나를 몰라.'
그들[비누 인간]은 자신을 사람이라고 느꼈다. 상남과는 그저 조금 다른 사람이라고. 
p. 127


하하호호 발랄하고 유쾌한 환상 동화도 아니고, 나 혼자 코 박고 읽는 성인 소설도 아니지만, 그 중간 즈음 어딘가에서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생각 거리를 던져주는 흥미로운 동화책을 찾는다면 <비누 인간>을 추천해드리고 싶다. 


*참고로 시리즈로 제작된다고 하니, 다음 편이 출판되면 세계관이 확장되어가는 재미도 생길 예정이다.   


이미지 출처: Yes24 <비누 인간> 표지 


매거진의 이전글 정교하게 직조된 주제와 인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