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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Dec 31. 2020

너는 이 세계의 일부란다

넷플릭스 영화 <나의 문어 선생님 (2020)> 감상평

지난 12월 20일 즐겨보는 방송 프로그램 <TV 동물농장>이 1000회를 맞이했습니다도서대여점에서 어떤 만화책을 빌릴지 고민하던 학창시절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프로그램이 정성스레 쌓아온 시간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져서 머리가 아찔했지요. 고양이, 강아지처럼 익숙한 반려동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인간과 공존하는 다양한 동물들의 희노애락을 꾸준하게 보여준 장수 프로그램. 일주일에 한번씩 무려 20년이라는 시간동안, 말도 못 하는 동물들에게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무관심하게 스쳐지나가 이내 사라져버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방송을 제작하시는 분들부터 방송사에 제보해주시는 분들까지, 말 못하는 미물이라고 흘려 보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었지요. 동물들의 이야기에 살아있는 힘이 꿈틀거리며, 그것을 바라본 저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따뜻한 눈물을 흘리기도, 뜨거운 화를 뿜어내기도 했습니다녀석들의 이야기가 내 삶에서 동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내 친구, 내 아이들의 이야기로 가왔기 때문이죠. 이번 글에서 소개해 드릴 넷플릭스 영화도 한 남자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선생님이 된 동물 이야기입니다.

 


<나의 문어 선생님 (2020)>(My Octopus Teacher)은 자연 다큐멘터리 카테고리 하나에 담기지 않을 만큼, 스토리텔링이 입체적인 작품입니다. 보통 자연 다큐멘터리하면 매혹적인 영상과 음악, 나레이터의 목소리, 인터뷰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이 영화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영상과 멋진 음악으로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안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는 보기 드문 사람과 문어간의 교감을 통해 감동적인 드라마를 펼쳐놓습니다. 바닷 속 한 생명의 일생을 따라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 함께 헤엄쳐 나가다보면, 기쁨, 설렘, 두려움, 안타까움,  그리움, 그리고 슬픔과 평안함까지 어마어마하게 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화는 크레이그 포스터라는 한 남자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회고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삶의 목적을 잃었던 그는 방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이 어린 시절에 자주 갔었던 바다를 다시금 방문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날씨가 좋으나 궂으나 매일매일, 그리고 아주 오랜 기간을. 바닷 속에 펼쳐진 3차원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 속에 잠수복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뛰어드는 그를 볼 때, 절망(絕望)을 빠져나오고픈 절망(切望:간절한 바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좌) 켈프숲을 헤엄치는 크레이그 포스터와 문어 (우) 영화 내 인터뷰 장면


여느 날처럼 켈프 숲으로 잠수하던 그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문어를 만나며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만남에서 이별까지 특별한 반전이 없는 단조로운 서사이지만, 그 안에 전해지는 감동은 그 어떤 영화보다, 새까만 먹물처럼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상대 배우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 동물 중에서도 겉모습이 이질적인 무척추 동물이라 특별했던 걸까요? 저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문어는 친한 사람과 낯선 사람을 구분하고, 유희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고도의 지능을 가진 영리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글월 문(文)이 들어간 이름(文漁:문어)이 괜히 달린 게 아니더라고요.  


(좌) 크레이그와 암컷 문어 (가운데) 크레이그와 그의 아들 톰 (우) 시기상 영화의 암컷 문어가 낳았을 것이라 추청되는 아기 문어와의 만남


You're part of this place, not a visitor (너는 방문자가 아닌 이 세계의 일부란다.) 지구에 공존하는 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과 진실하게 이어지는 연결. 진심이 점점 확장 되어가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이었습니다. 크레이그와 문어, 이들을 잇는 다음 세대 - 크레이그의 아들 톰과 손가락만큼 작은 아기 문어, 그리고 이들과 뜻을 함께 하며 오늘도 바다로 뛰어드는 커뮤니티 Sea Change Project, 영화를 통해 나와 같은 감동을 누릴 전 세계의 시청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영화가 닿으며 아름다운 확장이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하인드 씬>

1. 자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여정임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여성보다는 남성이 주도적인 업계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곳곳에 보이는 여성들의 힘이 더욱 더 보석처럼 빛나는 것 같습니다. 


문어와 함께 이 영화의 공동주연(?)을 맡고있는 크레이그 포스터의 어느 정도 이력을 쌓은 영화 감독이지만, 그는 이 작품에 감독이 아닌 프로듀서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피파 애를리쉬와 제임스 리드 두 사람이 공동 감독을 맡았으며, 개인적으로 놀라운 사실은 피파 애를리쉬가 여성 신인 감독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공동 감독 중 한명인 그녀는 크레이그와 함께 매일같이 - 그의 방식대로 잠수복 안 입고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 잠수를 하며 물 속 세상을 탐색(Tracking)하는 법을 배웠다고 감독 인터뷰에서 밝힙니다. 해양보존 저널리스트이자 스토리텔러로서 그녀의 능력과 열정을 본 크레이그는 6개월이 지난 뒤 2017년 초에 그녀에게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정식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공동 감독 중 한명인 피파 애를리쉬,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을 수영복만 입고 잠수하는 열정은 정말 대단합니다!
(좌) 엘렌 윈더머스와 사라 엘더슨이 영화촬영지 켈프숲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모습 (우) 제니퍼 메디어 교수와 그녀의 저서

또한, 크레이그의 지인이자 Off the Fence 영화 제작사의 창립자인 엘렌 윈더머스와 넷플릭스의 기획 편집자(Comissioning Editor)인 사라 엘더슨이 제작 책임자(Executive Producer)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지요. 물론 엄청나게 많은 스텝들이 참여했겠지만, E-level의 프로듀서 두 사람이 모두 여성이였고요. 다큐멘터리의 내러티브를 더욱 탄탄하게 하기 위해, 해양 과학자들의 감수도 필수적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문어 심리학였습니다. 레스브릿지 대학교 심리학과에 재직 중인 제니퍼 메디어 교수는 문어를 전문으로 연구하신 분이였습니다. 영화를 위해 캐나다에서 남아프리카까지 직접 오는 열정을 보여주셨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영화의 주연 배우도 암컷 문어였지요! 인간과 문어의 우정만으로도 경이로웠지만, 바닷 속 대자연 (영어표현이 마침 Mother Nature입니다) 안에서 자신의 새끼들을 부화시키며 생을 마무리 하는 엄마 문어였기에 영화의 여운이 더욱 강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상단의 글에 나온 정보들은 Sea Change Project 웹사이트에 올라온 "The Making of My Octopus Teacher by Swati Thiyagarajan"을 참조하였습니다.



2. 멀리서 찾을 필요없이 제 삶만 돌아보아도 과거와 현재, 환경과 동물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무지해서 의도치 않게 야만적인 부분이 많았고, 지금은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조금 덜 폭력적인 삶을 지향하고픈 방향성이라도 생긴 거 같아요. 여전히 적극적인 행동이 부족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느껴지곤 하지요. 그래도 죄책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 보다는 영화를 비롯하여 동물과 환경에 대하여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좋은 자극에 제 자신을 노출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완벽한 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변화가 무엇일지 한번이라도 더 고민하게 되거든요. 마침 동물과 관련한 책들을 2가지가 생각나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좌) 박소영 작가의 책 살리는 일 (우) 오보이 매거진 (출처: 오보이 웹사이트)

하나는 12월 15일 아주 최근에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 박소영 작가님의 동물권 에세이 <살리는 일>입니다. 영화 감상평 공모전과 시간이 겹쳐서 아직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읽어보지 못 했지만, Yes24에 올라온 책의 발췌문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상당한 불편함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피하기보다는 영화에서 얻은 용기를 조금 보태서 책을 펼치는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주부 8년차, 내 가족만 챙기는 이기적인 살림이 아니라, 진짜 살리는 일은 어떤 것인지 배워보겠습니다. (독서 선포!! ㅎ) 


또 다른 책은 2009년에 창간한 패션 문화 잡지<오보이!>입니다. 처음에는 김현성 작가님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알고보니 이 작가님이 제가 사는 동네에서 사진을 공부를 하셔서 더 애정을 가지고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만든 매거진을 있다길래 알아보니 지구의 미래, 환경과 동물복지를 꿈꾸는 비전이 너무나 멋있어서 홀딱 반하게 된 잡지가 바로 <오보이!>입니다. 마침 2016년에 브런치에서도 <오보이!>와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네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동물, 그 안에서 퍼져나오는 여러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이 한데 모여있어서 이 곳에 공유합니다. <오보이!>에 나오는 멋진 사진들도 보고 싶으신 분들은 공식 웹사이트(https://www.ohboy.co.kr/)에 들려보세요. 



단서련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감상평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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