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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Dec 31. 2020

자기 앞의 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나요? 사랑해야 한다!

넷플릭스 영화 <자기 앞의 생 (2000)> 감상평

마태복음 18장: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아이들은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를 한껏 낮출 수 있습니다. 넘어졌을 때는 아파서 울음을 터뜨리고, 길을 가다 졸릴 때는 어부바를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들은 그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곤 합니다. 사람은 관계에 의지하여 열매맺는 나무라는 것을.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신체의 땅을 딛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대화의 물을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감정의 햇빛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많은 것이 어우러져만 열매를 맺을 수 있지요. 이건 묘묙같이 아주 어린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를 살아온 어른도 마찬가지같아요.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해야 합니다. 전적인 의존과 전적인 독립의 중간 즈음 어딘가, 사람과 사람간의 의지가 아름다운 균형을 맞추는 그 지점. <자기 앞의 생>은 그러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미국의 합작영화 <자기 앞의 생(2020)> (영어:The life ahead/이탈리아어:La vita davanti a sé)' 에밀 아자르가 1975년 프랑스에서 출간한 동명의 소설 <자기 앞의 생>(불어:La vie devant soi)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더욱 재밌는 사실은, 이 소설이 '로맹 가리'라는 한 남자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을 써서 공쿠르 상을 수상한 작품이지요.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이라고 알려진 이 상은 한 작가에게 두번 상을 수여하지 않는 상인데, 이 작품을 통해서 로맹 가리가 유일하게 두번 수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소에 한국이나 일본 소설처럼 문장이 깔끔하게 읽히는 걸 좋아하는데, 지인에게 빌려 읽은 이 소설은 프랑스 소설이었는데도 너무 재밌어서 순식간에 호다닥 읽어버렸어요. 특히, 각 장면이 머릿 속에 스르륵 떠오를 정도로 작가의 묘사가 생생하다고 느꼈졌지요. 찾아보니,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동안 여러가지 버전으로 이미지가 추가된 2차 작업물들이 많이 나왔더라고요. 원작 소설이 출간된지 2년 뒤인 1977년에 <마담 로자>(Madame Rosa)라는 첫번째 영화 작업이 있었고, 이번 넷플릭스 영화는 바로 두번째로 영화화된 작업이었습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2019년 2월에 국립극단 초연으로 연극무대에 올라가기도 했고요. 마누엘레 피요르(Manuele Fior)라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가 작업한 삽화가 함께 들어간 책이 2018년에 문학동네에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좌) 시몬느 시뇨레가 주역을 맡은 영화 마담 로자(1977)(중) 오정택, 양희경 주연의 연극 자기 앞의 생 한장면 (우) 마누엘레 피요르의 자기 앞의 생 삽화 한장면


영화는 자기 앞의 생이 많이 남은 소년 모모와 자기 앞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마담 로자의 관계를 비추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담 로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도 한 때는 '엉덩이로 벌어먹고'사는 여자였었고, 나이가 든 지금은 매춘부들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어요. 또 다른 주인공 모모. 그는 고향인 세네갈을 떠나 피붙이가 하나도 없는 타지에 외롭게 살고 있어요. 코엔 박사의 보호 아래 있지만,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거나 마약을 팔면서 방황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요. 코엔 박사는 이 소년에게 긴밀한 양육자의 보살핌이 필요할 거라고 판단하고 마담 로자에게 모모를 부탁하게 됩니다.


마담 로자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는 모모와 로지프 (출처: https://images.app.goo.gl/GCV1xUETC1cbCHjM8)


마담 로자가 가정보육원처럼 쓰고 있는 허름한 아파트로 들어오게 된 모모. 그곳에서 마담 로자를 비롯하여 그녀에게 맡겨진 매춘부의 아이들, 트렌스젠더 미혼모 롤라, 마음 한켠에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나약하고 실패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가며 각자의 앞에 놓인 생, 심지어 마담 로자는 바로 앞에 보이는 듯한 생의 끝을 향해서 걸어 나갑니다. 만년작으로서 노령의 배우 소피아 로렌의 연기가 참 돋보였어요. 저는 그녀의 영화를 볼 때마다 눈으로 연기하는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위의 커버 사진을 보셨나요? 두 주인공이 여명을 바라보는 장면인데, 실제로 86년의 삶을 걸어온 할머니의 따뜻하면서도 슬픈 눈빛에서 많은 이야기가 들리는 듯 합니다.


닥터 코엔이 마담 로자에게 부탁하였듯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마담 로자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모모를 함께 돌봐주기를 요청합니다.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의 가게에 처음 일하던 날, 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A lion is a symbol of power, patience, and faith. Do you have faith, right? Faith is like love.
사자는 힘과 인내, 믿음을 상징한단다. 너에겐 믿음이 있지, 모모야? 믿음이란 바로 사랑과 같단다.


사랑은 지켜주고, 기다려주고, 믿어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믿음이라는 것. 한 사람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입니다. 예전에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한 첫째 아이를 크게 혼낸 뒤, 제가 쓴 일기가 하나 있어요.  아이가 엉엉 울면서 흘러나온 말에 뒤통수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 반성문을 쓰게 되었지요.


"나는 노력했는데.....!!"


아- 이건 부부 싸움하면서 제가 신랑한테 했던 말이었어요. 처절하게 신랑한테 소리치던 제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조급해 하지 말자. 나의 바람, 당장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꺼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주자.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어린 아이도, 그 녀석보다는 세상 좀 살았다 싶은 30대 아줌마도 똑같더라고요. 우리는 때때로 보살핌을 받아야, 상대방의 기다림에서 용기를 얻어야, 장애물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은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나의 곁에 있을 것이다.'라는 든든한 믿음이 있어야 행복하게 삶을 걸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모모처럼, 마담 로자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지라도 그저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주며 쌓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아름답다고 응원하는 영화 <자기 앞의 생>.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소설책에 나오는 모모의 가장 마지막 당부가 마음에 잔잔히 남게 됩니다. 사랑해야 한다.




<비하인드 씬>

주연 배우 소피아 로렌과 그녀의 아들 에도아르도 폰티 감독

1.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인 마담 로자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여배우 소피아 로렌, 영화의 감독은 그녀의 아들인 에도아르도 폰티가 맡았습니다.


이 영화로 11년만에 영화계에 복귀한다는 소피아 로렌은 1934년생으로 올해 연세가 86세라고 해요.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고 젊은 시절 미모를 잃기 시작하면 스크린에 나타나는 걸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할머니가 되어 스크린으로 복귀할 용기, 무려 86살의 체력을 가지고 장편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과감한 결정은 아들을 위한 엄마의 선물이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노년의 모습을 하나의 작품,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따뜻한 영화로 만들어 준 것은 엄마를 위한 아들의 선물이 될 수도 있겠네요.



2. 원작 소설도 읽어보시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어요. 둘다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이야기의 결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화는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고, 소설에서는 모모와 마담 로자가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미운정, 고운정이 얼버무려진 관계로 나오지요.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의 목소리와 시선을 통해, 어두운 사회 밑바닥을 보여주는데도 어둡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가 참 매력적입니다. 관심을 끌어보려고 아파트 여기저기에 똥을 막 싸갈기는 모모와 그를 앞다투터 따라하는 일곱명의 아이들 (p.15),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로자 아줌마가 젊은 시절처럼 요란스럽게 치장한 채 아이들 앞에서 인간의 엉덩이 같지 않은 거대한 엉덩이를 흔드는 장면 (p.182) 등등.


영화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바로 위에서 말했다시피 주연 배우와 감독이 엄마와 아들이라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에 원작 소설의 통통튀는 코메디적 요소를 살려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어요.  

    


3. 원작 소설을 쓴 로맹 가리의 자전적 이야기 <새벽의 약속>을 소설 혹은 영화로 보시면 또 다른 흥미로운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꺼예요.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프랑스로 이민을 왔어요. 그의 어머니 '니나'는 자신은 희생시킬 망정 아들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붓는 억척스러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로맹 가리였기 때문에 비참한 전쟁 중에도 첫 소설 "유럽의 교육(1945)"를 써서 비평가 상을 수상했고, 그 후 어머니의 바람대로 세계적인 작가로서 행보를 보여주게 되지요. 로맹 가리와 어머니의 관계는 바람직한 모자 관계라기 보다는, 작가에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가 대해서 깊은 고민을 던져주는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동이 트는 시간 새벽, 삶이 막 시작되는 그 시간에 로맹 가리의 작품에 투영된 가치관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4. 이 영화는 저와 함께 해외특파원(로마)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Iandos 작가님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는데요. 작가님께서 알려주시길 이 영화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지방의 항구도시, 바리 Bari에서 주로 촬영하였다고 해요. 영화 중간에 마담로자, 롤라, 그리고 아이들이 다함께 모여 식사를 했던 아름다운 장소는 Masseria Brancati 라고 알려주셨고요. 이 곳은 레스토랑은 아니고 Bed & Breakfast를 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라고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부둣가라던지, 길거리와 시장 등 그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 참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당장은 코로나 때문에 어렵겠지만, 버킷리스트에 올려놓고 우리 앞의 생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날 여행을 계획해보는 건 어떨까요?


자기 앞의 생 영화 촬영지 바리 (출처: https://www.atlasofwonders.com/2020/11/where-was-life-ahead-filme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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