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대화를 나누면 주로 듣는 쪽이고 중간중간 입이 열리는 반응들도 간결한 편이다. 여행 갈 때 신랑이랑 차를 타고 가다가 말다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신랑은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며 운전을 하고 있는데 나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동차 소음만 들려오는 조용한 드라이브를 태평하게 즐기고 있었기 때문.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적인 침묵을 깨기 위해 안절부절하지 않는다. 신랑의 표현에 의하면 정말 애교가 1도 없는 과묵한 여자.
말이 없으니, 그렇다면 생각에 깊이가 잠겨 사느냐?
브런치 독자인 당신은 '아.....(작가 지망생) 작가님은 말은 없을지 언정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비판적, 혹은 창의적 사고가 번뜩이는 그런 사람이셨군요'라며 위로해줄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다지 그렇지도 않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여기며, 누가 가르쳐 준 게 있다면 그렇구나 끄덕끄덕거리며 사는 두루뭉술한 인간으로 40년 가까이 살아왔다.
그런 내가 어쩌다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세상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이왕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2022년 새해에는 이런 나의 좁은 세상을 좀 더 넓고 단단한 것으로 일구는 제반 작업을 해보려 한다. 각각의 책들에는 작가들이 일궈놓은 멋진 허구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탐독하며 한 사람이 조물주가 되어 이야기 속 세계를 어떻게 구축해내고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를 찬찬히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세상을 세울 때 이 작업이 튼튼한 밑바탕이 되기를 바라며.
* 하단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 완독한 첫 책은 천선란 작가님의 <천 개의 파랑>이 되었다. 2019년 제4회 한국 과학 문학상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핸드폰 앱으로) 400 페이지가 넘는 SF 이야기를 몇 일 새에 막힘없이 술술 읽을 만큼 이야기가 흘러가는 힘이 좋았다. SF 광팬은 아니지만, 그동안 좋아했던 작품들을 추려보면 SF 색채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장르성이 강한 SF 소설들은 머리가 핑핑 돌아갈 듯한 전문 용어가 난무하거나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당최 내 상상력으로는 쉽게 그려지지 않는 모습을 배경으로 하면 사건 진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흐름이 뚝뚝 끊겨버리기 일 쑤다. 이런 면에서 천선란 작가님의 <천 개의 파랑>은현실 세계에 SF적 요소를 적절하게 배합해서 SF 광팬이 아닌 독자들도 이야기를 소화하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정세랑 작가님의 작품, 특히 <지구에서 한아 뿐>에서 느꼈던 분위기로 느껴졌다.
정교하게 직조된 여러 가지의 주제를 넘나드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빛을 투과하는 프리즘처럼, 허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작가님이 얼마나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작품마다 환경이나 약자와의 연대를 보여주었던 정세랑 작가님과의 또 다른 교집합이 될 것 같다. 주인공 연재를 중심축으로 기수 휴머노이드 콜리와 함께 과학과 문명을, 경주마 투데이와 함께 동물권을, 휠체어를 타는 은혜와 함께 인권을, 친구 지수와 함께 사춘기 소녀의 우정을, 엄마 보경과 언니 은혜를 통해 가족의 서사까지 아름답게 하나의 얼개를 이루고 있다. 너무 느슨하지도 너무 촘촘하지도 않게.
이야기의 얼개를 이렇게, 딱 좋을 정도로 만들기 위해 작가가 '인물'을 활용하는 법이 참 탁월하다. 엄마인 보경의 독백이 휴머노이드 콜리와의 대화에 나타나 글을 환기할 때, 초반부 편의점장이 슬쩍 던졌던 말이나 슬며시 나타난 방송국 기자 사촌 오빠가 나중에 위기를 해결하는 역할을 해낼 때, 인물들의 퍼즐이 맞아 들어갈 때마다 읽으며 감탄했다. 더군다나 퍼즐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간혹 터져 나오는 게 아니라 마치 1000 피스짜리 퍼즐처럼 결말을 향해 끊임없이 맞춰나가기 때문이다. 요리사가 만든 요리에 그냥 허투루 들어간 재료가 없었고, 손님이 요리를 음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부분 중 먹지 말고 버릴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천 개의 파랑>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책에 나온 모든 인물들이 필요했다. 덤벙대는 나는 과연 이렇게 해낼 수 있을까......자괴감이 들 정도. 평균 수명 100세 시대 멀리 보고 힘내자 ㅋ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인물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아름답게 엮어낸 이야기. 어떤 면에서 좋은 작가는 좋은 건축가에 가까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