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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Aug 11. 2022

예술도 투쟁이라고?

 개취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니 - 예술 사회학과 피에르 브루디

일상 사회학을 통해 사회학과 처음 만났다. 그 뒤에 (조사 방법론 같은 수업도 필수로 듣긴 했지만) 내 마음에 열정이 달아오른 연애 초기의 중심에는 예술 사회학이 있었다. 소소한 일상을 공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회학에 처음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니, 사회학 앞에 붙은 두 글자 '예술'에 마음이 설레는 건 나란 인간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술은 춤이었고, 당시의 나는 춤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나는 남들보다 일찍 춤을 '전공'했었다. 내가 다녔던 예술중학교에서는 교과 수업처럼 발레 수업이 매일 있었고, 학교가 끝나면 학교 옆 발레 학원으로 이동해서 수업을 한번 더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실기 시험을 준비할 때가 되면 빡빡한 일정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꽉꽉 쥐어짜 내 깜깜한 밤에 녹초가 될 때까지 연습을 하고 집에 와서까지도 (발레 할 때 턴아웃이 잘 되라고 하는) 개구리 자세를 하고 잠을 청하곤 했다.


그렇게나 힘을 쏟아부었지만, 안타깝게도 중학교 3년 내내 나는 군무의 어딘가에 끼워져 무대 위의 나를 찾으려면 한참이 걸리는 그런 역할만 맡게 되었다. 허허허! 발레를 한다면 앞으로 평생 동안 무대의 구석탱이만 차지할 꺼란 암울한 자기 예언에 억눌려 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쟁에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발레 전공을 포기하고 내가 불시착한 곳은 같은 한국 땅이었지만 또 전혀 다른 세계이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엉덩이를 의자에 진득하게 붙인 채 맹렬하게 대학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몰라도 일단 눈치껏 몸을 옹송그리고 곧 다가올 입시를 준비했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말은 잘 듣는 편이지만 들썩거리는 본능을 눌러 두고 뒤늦은 공부를 따라잡는 게 쉽진 않았는지 나는 수능을 마치기가 무섭게 철가루가 되어 춤이라는 자석에 다시금 철썩 붙어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난 춤은 바로 힙합! 그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Free style) 나를 표현하라고 했다. 그동안 원하는 기준 -- 손과 발은 이렇게 뻗어주고 시선은 이렇게 해야 하고 이 동작은 이렇게 점프해야만 하고 등등 발레에서는 공중에 떠 있을 때조차 원하는 모양새가 있었다 -- 을 만족시키며 춤을 춰 왔는데 내 맘대로 해보라니?! 게다가 심장을 터뜨릴 듯한 이 펑키한 음악은 뭐고?!


처음에는 모든 게 어색했다. 하지만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는 근본이 같기에 금세 엔진에 부릉부릉 시동이 걸려오기 시작했다.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나, 일주일에 두어 번 클래스를 듣는 걸로 성에 안차서 아예 댄스팀에 들어가 버렸다. 예술학교에 다니던 시절처럼 매일 만나 연습하고, 대회를 나가고, 심지어 연습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새벽 연습까지 하게 되었다. 슬슬 불어오던 춤바람이 사회학을 만날 즈음에는 회오리바람이 되어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춤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기제로서 예술을 유심히 관찰한 한 사회학자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브루디외(Pierre Bourdieu)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고프만처럼 브루디외도 사회를 공간적으로 파악했다. 그의 이론에는 '장(Field)'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브루디외는 이곳이 '투쟁'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보았다. 투쟁이라는 단어가 조금 무시무시하게 들려 우리들이 투쟁과 거리가 멀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지극히 갈등 회피 주의자인)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말했던 고전 사회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었으니까. 갑자기 웬 투쟁? 당장 살아내는 내 일상에서는 이마에 끈을 동여매고 깃발 휘날리며 청와대 앞에서 소리 지르고 시위에 참여할 일은 안 하는데?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어제도 했었고, 오늘은 더 열심히 교육의 '장'에서 투쟁을 하는 중일 것이다. 자신들이 점령한 위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혹은 자기 앞에 세워진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브루디외는 다양한 형태의 자본(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을 파악함으로써 투쟁이 이루어지는 사회 공간을 훨씬 다차원적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서 경제 계급 중심, 즉 생산 수단을 가진 지배 계층과 생산 수단이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피지배 계층 간의 관계로 사회를 파악했다면, 이제는 '투쟁'이라는 게임을 훨씬 역동적으로 바라보았다. 가족과 학교를 통해서 전해지는 지적, 미학적 능력과 이를 제도화시킨 자격들(문화적 자본), 우리가 흔히 '인맥'이라 부르는 관계에서 나오는 기회들(사회적 자본), 그리고 화폐는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예, 인정, 신용 등등 (상징적 자본) 다양한 형태의 자본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다시금 재생산이 되어간다.  


발레와 힙합. 그 자체만 뚝 떼어놓고 보면 한 개인이 그 세계로 들어가 춤을 배우고 오랜 훈련 기간 끝의 결과물, '춤꾼이자 춤 선생님'이라는 투잡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다소 열악한 경제적 상황은 상당히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당시에는 두 개의 예술을 둘러싸고 외부적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온도차가 있었다. 춤이라는 행위에 부여되는 의미가 달랐고,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달랐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달라졌다.


백인들의 문화였던 발레는 조명이 반짝이는 비싼 공연장에서 춤의 문법을 해석할 수 있는 일부 대중들의 하위문화가 되었고, 흑인들의 문화였던 힙합은 덩치 큰 문지기를 지날만한 담력을 내걸고 어두컴컴한 클럽으로 들어가 음악에 자유롭게 몸을 내던질 수 있는 반대쪽 대중들의 하위문화가 되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공연표를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 1시간이 넘도록 반드시 의자에 입 다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매너, 무대에서 펼쳐지는 춤과 음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문화를 소비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고급문화로 자리매김한 발레에는 그것을 소비 가능한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이 가진 (사회적) 자본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브루디외는 사람들이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지극히 사회적 계급에 묶여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특별히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모습으로 골라보았습니다 :D

브루디외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기도 했지만, 그가 살아있는 생애에 사회 정의를 소리 높여 부르짖는 행동하는 지성, 실천주의 참여 지식인으로도 평가받았다. 아마도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부조리한 세상을 더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타인 사이에 선을 긋는 매정한 구별 짓기에는 돈 말고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교묘하고 세련된 장치들이 잔뜩 숨어있음을. 취향과 기호라는 포장 안에 감춰둔 은밀한 차별과 폭력을 우리들이 깨닫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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