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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Jul 27. 2022

일상 생활을 연구한다고?

사회학과의 첫 만남 - 일상 생활의 사회학과 어빙 고프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2002년 여름. 


나도 거리로 뛰쳐나가 소리 지르고 박수 치고 사람들을 얼싸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빨간 옷 대신 빨간 펜을 벗 삼아 방구석에 틀어박혀 수험 생활을 했다. 그 타이밍에 입시생인 게 무진장 억울했지만, 유혹을 견뎌내고 때가 지나 동굴 밖으로 나오니 나는 곰이 아니라 인간으로 변해있었다. 


'대학생'이라는 인간으로.    


일단 쑥과 마늘 먹으라니까 먹어본다. (출처 https://blog.naver.com/powerjjj/222295489466)


나보다 먼저 살아온 이(先生)들이 해야 할 것을 손에 쥐어주고 코 앞에 가져다주는 미련퉁이 곰 생활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도록 해왔다. 그리고 같은 학생이지만 내가 해왔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대학생'으로서의 삶이 갑작스레 시작되었다. 나의 속내는 여전히 곰이었지만 말이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변화 하나만으로, 이제는 아무도 내가 해야 할 게 무엇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섭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뿅! 사라져 버렸다. 해변가에 쭈그리고 앉아 모래 놀이나 끼적끼적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들어 올려 커다란 망망대해에 배와 함께 떨어뜨려놓고. '자~그동안 바다랑 많이 친해졌지? 이제 네가 해고 싶은 대로 해봐라~'라는 느낌이랄까. 


여우 같은 친구들은 그렇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유, 그것이 주는 책임과 무게를 미리 꿰뚫어 보고 불안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조타실로 가서 지도와 나침반을 찾는 현명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곰 같은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괴리감에 전혀 주눅이 들진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미련퉁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 조타실로 가긴 갔는데 - 운전대를 덥석 잡았다. 내가 가게 될 길이 무슨 방향인지도 모르는 채 무모하게, 대학생이 되었다는 기쁨에 한껏 취해 미팅과 소개팅의 콧노래를 부르며.




내가 입학할 당시 사회과학부에는 8개의 전공이 모여있었다. 경제학과, 행정학과, 심리학과, 문헌정보학과, 비서학과, 사회복지학과, 정치외교학과, 그리고 사회학과. 


대학교 1학년 때에는 전공 기초 과목을 2개 이상 선택 수강하여 그중에서 어떤 전공을 해나갈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전교 학생 회장으로 당선된 적이 있어서 -- 어이없게도 후보가 나를 포함하여 2명밖에 없었던 선거 ^_^; -- 가족들, 특히 아빠는 내가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딸이었으니 아빠의 기대대로 정치외교학과에서 기초 과목 하나를 택했다. 그리고 온전히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의 제목에 이끌려 그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듣보잡 낯선 녀석을 하나 더 골랐다. 


바로 '일상생활의 사회학'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나무 끝!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cfavero/18628913438)

그때까지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들, 학자들이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밝혀낸 것들은 나무의 우듬지에나 있다고 느꼈다. 내가 경험하는 일상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잘 보이지도 않거나, 혹은 가깝더라도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붕~ 떠 있는 이야기. 정치외교학과에서 들었던 기초 과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에서 받은 느낌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입시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만 18세 대한민국의 여학생의 하루하루에는 '정치'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이 별로 없었을테니...(여대생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연구한다면 모를까나?)  


그에 반해 처음 만난 일상생활의 사회학은 너무나 신선했다. 20년 전이라 구체적인 내용들은 가물가물하지만 느낌은 첫사랑과의 만남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대학교 계단형 강의실. 앞에 보이는 새하얀 대형 스크린에 장식 하나 없는 밋밋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하나가 나타났다. 첫사랑의 순간은 슬로모션처럼 보인다고들 한다는데, 때 마침 교수님의 말투가 말 끝을 길게 늘이는 편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교수님은 빽빽한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며 누군가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범한 하루 일과를 훑어갔다. 인터넷 인기 강의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이끌어내는 수업은 결코 아니었고, 어쩌면 졸음과 사투해야 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운명적인 인연은 어떻게든 이어지려나 보다. 


반짝반짝, 이쁘다~ (출처https://unsplash.com/photos/VOoo-QFL7Uo)

이 수업에서 언급되었던 사회학자 중에는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있는 사회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생각난다.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뛰어넘는 1959년에 재밌는 책을 하나 썼는데, 국내에서는 <자아표현과 인상관리(1992)>라는 아주 딱딱한 -- 강의 계획서에 써 있지 않다면 딱히 살 것같지 않은 -- 책으로 소개되었다. 찾아보니 비교적 최근에 '현암사'라는 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 출간하여 인문교양서로 추천해도 좋을만한 책으로 거듭났는데, 이 버전의 부제목은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사회학적 통찰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메커니즘 -- 암묵적인 룰 -- 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고프만의 업적이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다양한 역할을 맡은 배우와도 같아서 같은 작품이라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말투라던지 행동이 달라진다. 게다가 배우가 무대 위에 서 있느냐, 혹은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떨어진 분장실/무대 뒤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집에서 부시시한 단발머리에 헐렁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애들한테 얼른 밥 먹으러 오라고 호통치던 내가, 아이의 학부모로서 학교라는 무대로 면담을 하러갈 때는 머리를 빗고, 옷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입가의 미소를 장전하여 아까와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듯이.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 극장에서 1인 다역을 맡고 있는 프로 배우들인 것이다. 


그렇게 고프만을 비롯하여 일상이라는 사회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학기가 지나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열매 같은 소소한 것들이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흥미로웠고 일상에서 풀어낸 분석들이 한껏 부풀어 올라 저 멀리 우듬지에 닿을 만큼 커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내 삶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학과 함께라면 무심코 흘려보냈던 하루하루가 반짝반짝 빛이 날 것 같았고, 하나하나 세심하게 --그것도 나름 과학적으로?! -- 들여다볼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첫사랑에 마음을 빼앗겨 전공 선택 당일, 나는 용감하게 '사회학' 세 글자를 적어 사회과학부 사무실에 제출했다. 


그때는 몰랐었다. 사회학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덩치가 커다란 녀석인지. 일상 생활의 사회학은 녀석의 새끼손가락 손톱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작디작은 일부에 반해 녀석에게 코가 단단히 꿰어 아주 오래도록 그와 함께 하리라는 것을.   




표지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FHT0KEOwt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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