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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Nov 06. 2022

내려갔다 올라가는 길

11052022_1

눈 밭이 눈앞에 넓게 펼쳐져 있다. 어찌나 광활한 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안개 같은 구름이 살짝 드리운 걸 보면 산의 정상인 거 같았다. 리프트도 없는 이곳까지 어떻게 온 건지, 어떻게 지상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이성적인 고민은 들지 않았는데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슬로프를 바라보자니 그걸 깨뜨리고 싶은 생각부터 들어왔다.


내가 제일 먼저! 내가 제일 빨리!


어느새 뒤에서 웅성 웅성 사람들이 몰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달려 나갈까 고민하다 두 발을 내려다보니 마침 스키를 신고 있다. 지구상 그 어떤 스키장에서도 본 적 없는, 마치 실처럼 얇지만 앞 뒤로 길게 뻗은 막대기였는데 나는 발에 붙은 그것을 스키라고 인식했다. 40년 가까이 겨울 스포츠는 제대로 배운 경험이 없는데 TV 중계에서 봤던 그럴싸한 모습을 떠올리며 무작정 몸을 낮춰 두 발에 몸무게를 실어냈다. 실오라기 같은 스키는 한번 기우뚱 밀리더니 나를 데리고 공기 눈가르기 시작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나는 내 뒤로 만들어진 자국을 감상하며 산을 내려갔다. 그 뒤로 더 멀리에 웅성대던 사람들이 잘 나가는 나를 구경하고 있다. 그들은 감히 내가 내려가는 산비탈로 발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온 세상이 나 바라보는 중이었다.


일 전에 보드를 탄다던 민준이 녀석이 엣지 자국이니 뭐니 떠들면서 거들먹거리던데, 지금 내가 만든 자국이야말로 엣지 그 자체다. 그 새끼가 이걸 봤어야 하는데.......대기업에서 몸값 높은 엔지니어로 지내다가 미국 실리콘 밸리의 IT 회사로 스카우트되어 날아가고 그 자리도 박차고 튀어나와 자기 회사 차리고 CEO가 돼서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를 누비는 녀석.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에라이, 역마살 껴서 비행기나 타고 있다면 하늘에서 내가 만든 작품이나 구경하라지!


뭔가를 해낸 듯한 기쁨, 오랜만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느끼는 승리감에 취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하하!

 



"흐흐흐......"

"어우야, 기분 나쁘게 잠꼬대까지 하는데.....?!"

"어떡해! 침도 흘리는 거 같아!"

끅끅 거리며 웃는 듯하다가 마침내 꺅꺅에 가깝도록 난리가 난 여학생들 소리에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영혼은 지하철로 돌아오지 못하고 여전히 눈 덮인 산을 미끄러지는 중이었다.

"아씨......진짜?!"

예상컨데 5kg는 족히 될 내 머리통. 그것의 압박을 얼마간 견뎌내던 여학생이 이제는 참지 못하고 자기 어깨로 내 관자놀이를 팍 쳐냈다. 그제야 현실 감각이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으......."

정신 차리게 해 준 건 고맙지만 약간 마른 체구의 여학생이라 그런지 어깨뼈가 뾰족했다. 그 충격이 상당해서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올라왔다.

옆을 보니 세상 무서울 것 없는 10대 소녀가 온몸으로 나에 대한 혐오를 내뿜는다. 이 와중에 매섭게 노려보는 앳된 얼굴이 예쁘장하게 보여서 더욱 민망해졌다. 카리스마에 잔뜩 눌려버린 나는 헛기침을 하며 허겁지겁 자리를 일어났다. 지하철 옆칸으로 도망가는 내 뒤로 여학생들의 웃음이 비수가 되어 뒤통수에 냅다 꽂힌다.


스키에 몸을 싣고 설산을 쌩쌩 내달는 꿈과 달리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제일 먼저도 제일 빠른 것도 아니었다. 나는 중(中)보다는 소(小)에 가까운 작은 중소기업 팀장이었고, 지난 몇 주간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엉킨 실타래 같은 프로젝트를 떠안고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얼마나 엉켜있는지 12년 연속 기네스북에 올랐다던 판매왕 조 지라드(Joe Girard)도 이 프로젝트를 맡는다면 너무나 지랄 맞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랄까.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내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을 향해,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를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왠지 모르게 위보다는 아래를 보게 된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구두에 시선을 두는데, 풀리지 말아야 하는 구두끈이 긴 수염처럼 늘어뜨려 있었다.     




Cover: the photo taken by Danceren and the images on on the RammoJammo cards illustrated by Yoon Ba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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