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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Nov 09. 2022

아내

11092022_2

"으르르....."

아내가 문을 열고 나타나자 사자 무리 속에 껴있던 나는 부들부들 몸이 떨려왔다. 그러다가 문 뒤쪽으로 예나보이자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그래 소용없어. 예나는 새끼 곰이랑 노는 데 흠뻑 빠져있으니까......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했지? 그래서 내가 제일 좋은 특식으로 준비해봤."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사자 무리를 헤치며 다가오더니 내 목에 그녀의 오른팔을 휘감았다. 엄청난 힘으로 조여와 아무리 아등바등거려도 머리가 꼼짝을 못 했다.

"이걸 먹어두면 널뛰는 감정이 한층 누그러들 거야."

아내가 내 입을 벌리더니 물컹한 무언가를 집어넣는다. 먹지 않으려고 용썼지만 그것에게 다리라도 달려있는 건지 뒤쪽을 향해 맹렬히 달리다 내 식도로 냉큼 점프를 해버린다. 007 작전처럼 심장에 가까웠을 때 즈음에 팡 터지는 느낌이 들고는 분노로 방망이질하던 내 심장이 신기하리만치 여유로워졌다.

나는 착하기로 소문난 레브라도 리트리버 개처럼 아내의 발치에 고개를 대고 엎드렸다. 그녀가 뭐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듯 얌전히. 내 머리칼,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자로 변해버린 나의 부드러운 갈가 아내의 발을 덮었다. 아내는 내게서 발을 빼고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서더니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처음 사자로 변했을 때처럼.

개와 주인의 거리에서 다시금 그녀의 눈을 올려다본다. 오묘한 헤이즐 눈동자. 마치 은은한 달빛의 세기로 밝기를 조절해놓은 태양을 홍채에 새겨 넣은 듯한 눈. 약혼녀를 옆에 두고 나를 한 눈 팔게 만들어버린, 내가 첫눈에 반해버린 눈이었다.

저 매혹적인 눈을 보는 바람에 나는 원래 있던 약혼을 기어코 깨뜨렸고, 새로운 약혼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오랜 구애 끝에 그 결혼의 언약을 맺은 뒤 3년이 지난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아내는 마녀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개 같은 사자로 변했고, 나를 이렇게 변신시킨 것은 바로 저 여자이다.


우리는 결혼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여행을 왔다.  

"이번 여행은 내가 한번 짜 볼게."

어느 날 아내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게 말했다. 희미해서 미소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미소를 걸고.

"....... 그래?"

무언가를 여자에게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지만 그래도 저 이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지간한 건 해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알겠어. 근데 중간중간 나한테 업데이트해주고."

아내는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여행을 떠나기 6개월 전 지중해에 인접한 유럽으로 정해지고 3개월 전에는 이탈리아 로마로 좁혀졌다. 그리고 한 달 전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통보받았다. 그곳은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섬이었고 아내는 이탈리아어에 꽤 능통한지라 나는 그녀의 결정을 철석같이 믿어주었다. 게다가 그즈음은 휴가를 떠나기 전 내가 맡은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어놔야 한다는 강박에 아내가 말하는 희한한 섬의 이름흘려듣게 되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 비행기를 타고 로마 공항, 택시를 타고 테르미니 기차역, 기차를 타고 안치오 여객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또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비수기여서인지 아니면 아내가 개인 소유의 배를 예약해서인지 승객은 아내와 나, 예나 우리 셋 뿐. 그즈음에 섬에 들어가는 사람이 우리 셋 뿐이지? 한 번쯤 의심해도 좋았을 텐데 온갖 교통수단을 거쳐 피곤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고, 마침맞게 지중해의 태양에 적당히 데워진 바닷바람이 몸을 노곤노곤 주무르니 머리를 굴릴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내가 계획한 섬에 도착했다. 발을 딛자 아내는 마치 고향집에 온 사람처럼 두 팔을 벌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그간 한 번도 듣지 못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Αἰαία!"라고 소리를 쳤다. 바닷가에 있던 나무들이 그녀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면서 인사를 하는 듯했다. 마치 왕에게 경배하고,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하인처럼.

그 의아한 풍경을 목도하고서도 나는 두 여자, 작은 예나의 손을 꼭 잡고 오솔길로 걸어가는 아내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

'제 엄마를 똑 닮아 예쁘고 순한 내 딸, 예나. 앞으로 시간이 훌쩍 흘러 성인이 되고 결혼도 하겠다고 우리를 찾아오겠지?'

아내가 서 있는 자리에 나를 겹쳐 보았다. 딸의 손을 꼭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 나가는 아빠. 남자로서 믿을만한 믿을만한 녀석에게 넘겨줄 수 있기를 생각하다 보니 코 끝이 벌써 찡해져 왔다.


그때였다. 손으로 코 밑을 문지르는데 코가 젖어있었다. 그쯤에서 두세 걸음 나갈 땐 볼이 간질거리더니 긴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고 머리숱도 점점 풍성해지더니 -- 오랫동안 염원해 온 거긴 하지만 이런 식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 갈가 되어 얼굴을 둘러쌌다. 상체가 점점 무거워져 팔이 땅을 짚을 수밖에 없었고 수직으로 서 있던 척추가 수평으로 길게 뻗어 나는 4족 보행을 하는 꼴이 되었다.

"크아아아!"

아내를 부르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가 예나를 잠시 자리에 세워두고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사자로 변한 나를 보더니 만족스럽게 씩 웃는다.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아내는 마치 독심술을 하듯이 내가 하고픈 말을 듣고 대답을 해나갔다.

".........내가 변신시킨 게 맞아. 그리고 여긴 내 섬이거든. 오랫동안 떠나 있었지만, 이곳에 오니까 역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가능하네."

나는 어쩌다가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지, 잘못을 했다면 용서를 받을 수는 없는건지.......그런 나를 보더니 아내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추었다.

"이제 와서 뭘 알아내려고 너무 애쓰지 마. 너무 늦어버린 거 같아. 애를 키우면서 혼자 너무 힘들었어. 아까도 얼핏 들었지만 우리 딸이 온순하다고 생각해? 지난 2년간 어땠는지 자기는 전혀 모르고 있어."

아내는 일어나더니 예나를 확인하려는 듯 그쪽을 한번 쳐다본다. 예나는 나무를 붙잡고 어른 허리 높이 즈음 올라가 있고 나무 주위로 어느새 토끼와 다람쥐가 몰려와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여기서 키울 거야. 나를 도와주는 모든 것들의 도움을 받으며 말이지. 아, 늘어지게 잠부터 자야지." 

아내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딸아이 쪽으로 걸어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황당한 일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내 마음은 분노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 폭풍의 눈, 아주 좁다랗고 고요한 그곳에 다른 마음도 하나 들어있었다. 피할 수 없는 책임을 향해 걸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아내가 정말 힘겨워 보인다고 느꼈다.


Cover: the photo taken by Danceren and the images on on the RammoJammo cards illustrated by Yoon Ba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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