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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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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Dec 06. 2022

미쳐가는 건 어른일까, 시대일까?

광기에 가까운 폭력성이 오락이 되어간다

엄마와 나는 종종 영화관 데이트를 했다. 엄마와 함께라면 나는 관람 등급의 제약에서 스르르 풀려나곤 했다. 12세 너머, 15세 너머, 청소년이라는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근데 대부분 영화들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고 - 다행히 실내가 깜깜해서 알 순 없었다! -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드는 야리꾸리한 장면보다는 어린애들이 감당하기에는 눈을 뜨고 보기에 견디기 힘든 가학적인 장면 때문에 그렇게 분류되었던 거 같다.


인상 깊은 첫 경험은 초딩 때 보았던, 15세 관람가 영화 '파워 오브 원(The Power of One). 명작으로 평가받는 영화인만큼 스토리도 탄탄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영화를 본 소감을 일기로 써서 선생님께 칭찬 받은 기억도 난다. 근데 영화의 초반에 주인공 PK가 기숙학교를 들어가는데, 주로 독일계 백인들이 있는 이 학교에서 영국인의 무자비한 통치에 대한 보복으로 어린 PK(아마도 영국계 백인이겠죠)를 괴롭히는 장면이 나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때 PK에게 ㄸ을 먹으라고 했던 거 같다! ㅜㅜ 나랑 별로 나이 차이 나지도 않는 오빠들이 보여주는 무자비한 억압, 그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40살이 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흉처럼 남아있다. 충격 요법 덕분인지 후반부에 권투 장면은 덤덤하게 볼 수 있었다. 단단한 주먹보다 더 무서웠던 ㄸ의 위력!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머리가 조금 커진 1998년, 그 해 개봉작인 전쟁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게 되었다. 관람 등급은 미국에서는 Restricted 청소년 관람불가, 한국에서는 15세 관람가로 나온다(한국은 학생이라도 6.25 관련 영상에 많이 노출되었다는 가정 하에 등급이 낮게 나온건가?). 이것도 엄마와 함께 보았는데 당시 나는 만으로 치면 13세였지만 한국 나이로 15세 턱걸이에 걸렸기에 엄마의 도움(?)없이 당당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깨갱하고 시작부터 꼬리를 내리고 만다. 대포가 빵빵 터지고 군인들 팔, 다리가 슝슝 떨어져 나가고, 그것들이 노르망디 바닷가에 널브러진 모습 어마어마하게 큰 모니터에서 눈앞의 현실처럼 펼쳐지니 (전시 상황의 몰입감이 굉장하여) 혼이 쏙 빠지고 말았다. 마음의 준비 없이 보러 갔다가 입고 갔던 겉옷 안으로 숨었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2시간 49분 러닝타임을 어찌어찌 버텨냈던 힘겨운 기억이 난다.


그 뒤 20여 년간 문화 콘텐츠에 등장하는 폭력에 대한 내성을 조금씩 올려갔다. (영화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공로가 컸다. 고마워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풀어갈 때 갈등은 필수적이고 그 안에서 폭력은 만능 양념과도 같았다. 전쟁이, 조폭이, 일진이, 도둑이, 사이코패스가, 복수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때리고 찢고 누르고 뽑아내고 쏴버리고 죽여버린다.


어렸을 때 유관순 위인전을 읽으며 "엄마, 나는 3월 1일에 밖으로 못 나갔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총 맞기도 무섭고 감옥 가서 고문당하는 것도 너무 무서워."라며 (누구도 비난하진 않았지만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독립 운동의 배신자라는 셀프 죄책감 마음에 품) 폭력이 내뿜는 공포 앞에 무릎을 꿇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이기에 아무리 덩치 큰 어른이 되어도 세상 곳곳에서 흘러넘치는 폭력성을 보면서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담력은 대중들의 평균치에서 한~~~참이나 아래였나 보다. 사람들은 더 많이, 더 센 것을 원했고, 창작자들은 그런 요구에 반응하고자 폭력의 종류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응해갔다.


어제 오래간만에 신랑이랑 넷플릭스에 뭐가 있나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20여분이었나, 아주 짧은 시간 영화나 드라마를 둘러보는데 요즘 뜨는 추천 콘텐츠(Top 10)가 보여서 손쉽게 보이는 것부터 클릭했다. 2022년 브래드 피트 주연 새 영화 불렛 트레인(Bullet Train)에서는 시작한 지 15분이 되기 전에 갈고리가 사람 머리를 뚫고 나오는 장면이 나오고, 다음 작품으로 클릭한, 팀 버튼 감독이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 8부작 드라마로 만든 웬즈데이 (Wednesday)에서는 1화에서부터 교통사고를 당해 기괴하게 목이 꺾인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나이가 들고 허구 이야기 속 폭력성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자부했지만 짧은 시간 연달아 들이대는 자극적인 장면들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우리들은 이런 것들이 인기 있는 작품이라고 추천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가 미쳐 돌아가는 걸까?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도 광기에 가까운 폭력성이 오늘날 대중들, 이 시대가 열광하는 오락성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옛날에도 단두대에서 사형을 집행하거나 마녀 화형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던데 이 시대가 특이한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이런 걸 재밌다고 보게 되는 걸까? 어른이든 시대든, 뭐가 되었든지 간에 나는 미쳐가지 않도록 잡도리를 해놔야 할 것 같다.       



환절기가 되어 피부가 부쩍 건조해졌다. 가려움이 느껴져서 긁어주면 가려움이 해소되어 강렬한 쾌감이 온다. 하지만 생각없이 원하는 만큼 벅벅 긁다보면 피부가 손톱에 긁혀서 피가 나고 못생긴 딱지가 덕지덕지 붙게된다. 자극적인 매체에 중독되는 것도 이런 거겠지? 정신없이 빠져 들어 읽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독자의 마음에 생채기가 나 버리는, 그런 작품은 만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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