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를 유치원에서 픽업하면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파트에 도착하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주차장은 지하 1층, 우리 집은 4층에 있다. 사실 그 정도면 하루 중 두어 번 할 운동으로 딱 좋은 거리이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있을 때 - 다시 말하면 거의 언제나 ㅋㅋㅋ -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조그만 상자로 들어가 버튼을 딱 누르면 다리 한번 움직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층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게다가 그곳에서 짬을 내어 카톡도 한번 확인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삶인가.
조그마한 아이와 함께 다섯 층에 다다르는 거리를 계단으로 이동하는 건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나에게는 1칸이든 2칸이든 3칸이든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슥슥 지나갈 높이이건만, 아이는 온몸을 이용하여 - 때로는 마음 크게 먹고 - 넘어서야 할 장애물들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계단'이라는 장애물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힘겨울지라도 내가 능히 감당할 만한) 도전에의 희열을 찾는 것 같다. 더군다나 그 손쉽고 만만한 장애물이 끝도 없이 펼쳐지니 아이는 가다 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모험에 빠져들어 간다. 아이에게는 신나는 모험이 될지언정 빨리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해 먹이고 다음 행선지인, 첫째 아이 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때의 나는 막내의 그런 느린 속도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근데 어제는 내 두 손에 짐도 가득이었건만 엘리베이터를 탔다면 누릴 수 없는 풍경들, 이제 갓 봄에 들어선 2월의 따뜻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 때문인지 아이의 느린 속도가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한 계단 두 계단, 아이의 뒤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다가 각 층으로 들어설 때 열쇠로 문을 열어줘야 해서 4층을 앞에 두고 아이를 지나쳐 문으로 갔다. 문을 열어 발로 고정해 두고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아이는 계단 끝에 주저앉아 버린다.
'역시 계단 올라오느라 힘들었나.......?' 생각하며 기다리는데 앉아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후딱후딱 이동하던 본성이 튀어나와 "이제 그만 가자~"라고 말하며 아이를 재촉하는데 생각지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집중해서 영화 관람하는 중 :)
"엄마, 나 영화 보는 중이야."
"응?"
"나무 영화."
아이의 대답을 듣고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계단 옆풍경을 눈여겨보는데 탄성을 자아낼 만큼 높이 솟은 나무들이 영화의 프레임처럼 잡혔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흔하지만 서울에 있었더라면 높이 솟은 우듬지 때문에 가히 환상적이라 말할 만한 레드우드가 덤덤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일상적이면서도 낯선 풍경은 한편의 영화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디서든 관람객의 마음을 가지고 궁둥이 붙이고 주저앉기만 하면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4살 아이의 세상. 이왕이면 보고 나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작가님들 중 좋은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글을 쓰는 경우도 많은데, 오늘 나는 깔깔깔 웃음을 터뜨릴만한 재밌는 코미디 영화 한 편 봤으면 좋겠다!
(관람객 혹은 감독이 되어야 하는데 시트콤의 여왕이 되어 배우로 맹활약하는 나 ㅜㅜ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