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 그러니까 내가 어릴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만화 <드래곤볼>을 보면 상대방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최첨단 안경이 나온다. (최근 버전으로 이해시키자면 아이언맨에 AR 모니터라고 해야할까) 만화에서 '스카우터'라 불리는 이 아이템, 어제 나는 이것의 개발이 시급함을 느꼈다.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도 이 사람이 얼마나 덜렁대는지를 알려주는 스카우터를 발명해서 덜렁 지수가 특정 기준치 이상인 사람을 가려낸다. 그리고 그가......특히 그녀가 결혼이라는 계약제 공동체 생활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녀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질임을 신신당부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지난 겨울부터였나 온라인으로, 그것도 일주일에 달랑 한번 수강했던 댄스 클래스마저 듣지 못하고 살았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하려면 엄마의 취미 생활이 제거 대상 1순위이니까. 하지만 춤을 너무 좋아해서 필명 마저 단서(Dancer)가 들어간 단서련에게 춤이 없는 삶은 너무나 강팍하지 않은가. 일주일에 단 한방울이래도 춤에 다시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예전에 들었던 수업을 알아보니까 겨울 방학을 마치고 최근에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실시간으로 클래스를 송출해주는 뉴욕의 시간은 월요일 정오 12시, 내가 사는 서부 시간은 월요일 오전 9시였다.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둘째의 유치원이 문을 여는 시간이다. 짱구를 돌려 월요일 아침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1. 첫째 둘째 간식 도시락 준비. 초등학생인 첫째 8시 15분까지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기
2. 둘째 깨워서 아침 먹이고 등원 준비 + 신랑 아침 식사 준비 (재택 근무 신랑 오전 미팅)
3. 집 나가기 전에 댄스 클래스 수강할 수 있게 노트북 세팅을 미리 마쳐놓기.
4. 유치원 문이 9시에 땡! 열리자마자 둘째를 떼어놓기 (최근에 함께 있던 한국 친구가 유치원을 떠나면서 분리 불안이 심해져서 난관 예상 ㅠㅠ)
5. 레이싱카 선수처럼 운전(주택가 길 말고 익스프레스 웨이로!) 해서 집으로 돌아오기.
음.......빡빡하긴 한데 잘하면 9시 15분까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월요일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4번과 5번 사이에 매월 10일 전까지 납부해야하는 유치원 수강료를 끼워넣어야 한다. 사실 지난주에 했어야 하는데 까먹고 못 내서 이번주에 반드시 처리해야 했다. 유치원 등원 시간에 맞춰 '둘째 유치원 수강료 납부'라고 이름을 지어준 13번째 알람(평소에 만들어 둔 알람이 12개ㅋㅋㅋ ㅜㅜ)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계속 머릿 속으로 돌려보았다.
비장한 마음을 먹고 일요일 저녁 강사님의 인스타그램에 클래스 홍보 포스팅이 올라오자 곧바로 페이팔로 수강료를 지불해놓았다. 오랜만에 듣게 될 댄스 클래스라 마음이 설레였다.
월요일 아침, 하나씩 하나씩 도장깨기를 해나간다.
1번 완료!
2번 완료!
3번 완료!
4번, 알람 덕분에 수강료 체크도 전달! 울먹거리는 둘째 떼어놓는라 시간이 조금 초과되었지만 완ㄹ........를 외치려는데 뭔가 쎄하다.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멍게!!!둘째 도시락을 빼먹고 안 가져왔다!!! ㅠㅠ
요즘 말로 현타라고 하던가, 맥이 풀리다 못해 이런 내가 너무 지긋지긋하다. 짧은 순간 지난 몇 달 덜렁대다가 저질렀던 실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파 밸리로 여행 갔다가 교회 모임에서 나눠먹으려고 포도 주스랑 치즈 스프레드 사왔는데 포도 주스만 챙겨가고 냉장고에 고이 보관해놓았던 스프레드랑 크래커는 빼먹고 왔던 일, 주일에 식당 봉사를 할 때 각 가정마다 김치 한 통씩 볶아오기로 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사온 건 큰 통이 아니라 중간 사이즈 통이라서 우리집 먹을 김치까지 다 써버려야 했던 일, 2달 전 아이들 즐겁게 해주려고 놀이동산 갔는데 롤러 코스터도 아니고 어린이 기차 타다가 잃어버린 핸드폰 (그리고 그것을 또!!! 잃어버리는 바람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이틀 전 토요일) 등등 그 때마다 군대 선임처럼 나를 보던 신랑의 눈빛은 덤. 그 이도 짜증나겠지만 당사자인 나도 답답하거니와, 나는 왜 내 앞가림도 못하는 덜렁이인데 신랑에다가 아이 둘을 주렁주렁 챙겨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하겠다고 나섰는지 과거의 나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고 싶었다.
너는 덜렁 지수가 기준치 이상이라고!!!!안경이 이미 깨졌어!!!!!!!!
이 여자 상상 이상으로 덜렁댄다!!!
둘째가 유치원에 3시간 가 있는데, 도시락 전달까지 마치고 나니 이미 1시간이 지나있다. 댄스 클래스는 이미 포기했고 이 시간에 첫째 아이 클래스에 자원 봉사하겠다던 이어북(Yearbook) 작업이나 하고 있기로 했다. 근데 생각처럼 진행이 잘 되지 않는다. 이 와중에 곧 있으면 둘째를 데려러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피로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어버린다. 오지랖인건지, 이런 저런 책임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라이드를 하다가 오후가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녁 식사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신랑에게 부탁을 했더니 저녁 식사 준비를 해주긴 해주는데 덜렁이 버전 냉장고랑 선반을 보면서 잔소리가 쏟아져내린다. 결과만 보면 혼나도 마땅하겠지만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내 몸에 벤 40년이 이모양 이꼴인데! 그래서 어쩌냐는 말이냐!라는 마음이 들어 서운함이 점점 차올랐다. 아침부터 오후, 아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온 몸에 차 오른 슬픔이 물방울이 되어 눈물 구멍으로 퐁퐁 솟아오른다. 이럴 때 가까운 학창 시절 친구나 친정 엄마라도 부여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외 살이의 외로움에 눈물이 더 많이 올라왔다.
주변을 보면 다들 제 할일을 묵묵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들 중에 나처럼 덜렁 지수가 높은 사람이 있긴 한걸까. 나는 덜렁 지수가 높은 바람에 용감하게 결혼에 출산, 육아까지 가능했던 거겠지. 일단 일은 벌려놨으니 물려버리긴 힘들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서 덜렁 지수를 대폭 낮출 수 있는지 고민 좀 해보자....라고 쓰는데 마침 알람이 또 울린다. 그래, 그만하고 나가야지. 한풀이 글 쓰다가 애들 학교 등교까지 까먹는 여자는 너무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