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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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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Mar 04. 2023

내게 너무 어려운 그대, 영어. No Brainer!

미국에 살게 된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영어 표현을 잘 몰라서 (더군다나 그 뜻이 나의 추측과 정 반대라서) 진땀 빼는 일이 종종 있다. 어제는 그런 일이 하루동안 무려 2번이나 있었다. 대체 언제쯤 이 분과 완전히 친해질 수 있을까나.


미국과 한국의 학교에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졸업 앨범을 학교를 떠나는 시니어만 받는 게 아니라 전교생이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3학년이 된 우리 아이는 유치원(Kindergarten)을 마치고 받은 앨범, 1학년을 마치고 받은 앨범, 2학년을 마치고 받은 앨범, 현재까지 3개의 졸업 앨범을 가지고 있다. 학업을 마친다는 의미의 졸업은 전체 학교를 마칠 때뿐만 아니라 지난 가을에서 올 봄학기에 이르기까지 Academic year 한 해를 같은 학급과 함께 마무리하는 의미를 살려 영어로는  'Yearbook'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이들은 매년 전형적인 (ㅋㅋㅋ) 졸업 앨범 스타일로 사진을 찍고, 각 반의 학부모 자원봉사가 협업하여 한 권의 졸업 앨범을 완성해 낸다. 올해 나는 앨범 자원봉사자로 지원을 하였는데 디자인 플랫폼에 내 이메일로 접속을 하면 전체 앨범이 보이지만 우리 반에 할당된 2페이지만 접근 및 편집이 허용이 되는 방식으로 일한다. 전체 관리는 앨범 총괄 관리에 지원한 또 다른 학부모 자원봉사자가 하게 된다.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통 한 페이지에는 선생님들과 학생들 사진을 나열해 놓고 나머지 페이지에는 지난 한 해 동안 교실에서 진행된 여러 가지 활동 사진들로 꾸미게 된다.


며칠 전 처음으로 디자인 플랫폼에 접속해 본 나는 플랫폼 UI가 영 익숙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끝내 디자인을 완성하지 않은 임시 상태에 멈춰서 스크린을 캡처한 뒤에 총괄 관리를 맡은 학부모에게 스크린 캡처를 공유하면서 이메일을 보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도움 요청과 함께. 그분은 바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근데 방법을 알려준 게 아니라 친절하게도 내가 캡처한 임시 프레임들을 보고 문제 자체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미 처리를 해서 답신을 주었다. 고맙긴 한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메일을 다시 한번 더 보내야 했다. 이번에는 네가 방금 처리한 일을 한 번만 더 해줄 수 있냐는 부탁과 함께. 고맙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함께 전했다.   


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하루가 꼬박 지나고서 어제 오전에서야 답장을 받았는데 그의 이메일에는 인사말을 하고는 제일 앞에 '우선'으로 시작되는 단도직입적인 본론이 나왔다.


First off, keep asking away.


부끄럽지만 나는 Ask away라는 표현을 여기서 처음 들었다. 고지식의 최고봉인 나는 Keep something (away) from ~을 떠올린다. 무언가를 ~으로부터 멀리하다......... 어머 어머 어머! 내가 자잘한 거 계속 부탁해서 귀찮다고 이러는 건가? 부탁하려면 한 번에 부탁할 것이지, 일처리를 이렇게 하냐고 꼽주는 거야? 내가 돈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이들 위해서 시간 들여서 자원봉사하는 건데 이렇게 매몰차게 해야만 하는 거니? 아무리 스무 명에 가까운 학부모 자원 봉사자들을 챙겨야 한다지만 나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한테 너무 각박하잖아...... 이메일의 첫 소절을 읽고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이 되어 혼자서 북과 장구를 연신 쳐댔다. 덩기덕 쿵 더러러러!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에는 이메일 경우 익숙하지 않은 표현, 즉 구어적인 표현이 있으면 그냥 넘어갈 때가 많은데 이 표현은 어떤 뉘앙스로 나를 다그친(?) 건지 궁금해져서 번역기에 돌려보았다.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Keep asking away를 쓰고 엔터를 누르자 반대편 번역창에 내가 추측한 의미와 달리 '계속 물어보세요'라는 친절한 말이 뿅 튀어나왔다. Keep 에는 어떤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의미가 있는데 Ask away는 질문하라는 긍정의 의미이고 그 상태를 지속하게 하는 Keep이 붙어있으니 상대방은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계속 물어도 좋다는, 허용을 넘어선 친절을 보였던 것이다. 첫 소절을 달리 읽으니 뒤에 붙어있는 단락의 어투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메일로만 만난 그 분의 성함은 남자였는데 하마터면 멀쩡한 신사 한 분을 부하 직원을 쥐 잡듯이 쪼아대는 파렴치한 악덕 사수로 만들 뻔했다. 애먼 사람 잡지 않아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또 일상으로 돌아갔다. 간간이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러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신랑이 재밌는 게 있다며 나를 불렀다. 세금 보고 관련하여 검색을 하다가 어떤 게시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어떤 분이 질문을 하나 올렸댄다. 그 게시글에 대한 조언으로 A라는 사람이 댓글이 하나 달아주었는데 A의 댓글에 대한 댓글로 B가 이렇게 써놓았다.


No brainer.


신랑이 나에게 이게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어보는데 (하하하~) 부끄럽지만 이것도 또 난생처음 보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고지식 뇌를 풀가동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뇌가 없다고? 단세포 말하는 건가? 이거 욕 아니야?"


신랑은 깔깔대며 웃는다. 아, 내 추측이 틀렸구나. 그러면서 나와 똑같은 추측을 하셨던 A의 댓글을 보여준다. 이 분도 B가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B를 향해 장문의 반박을 늘어놓으셨다. 지나가던 C가 No brainer는 아주 당연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을 말한다고 댓글을 달아주셨다. 찾아보니 신조어도 아니고 사전에 공식적으로 등재되어 있을만큼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B는 모욕이 아니라 A에 대한 동의의 표현을 해주셨던 것! 신랑은 몰랐겠지만 하루에 영어에게 뒤통수를 2번이나 얻어맞은 나는 그 부분이 괜히 얼얼하게 느껴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글을 갈무리하는 동안, 90년대/2000년대를 풍미하던 락그룹 '노브레인'이 이런 의미(너무나 당연한지라 no mental effort)에서 노브레인으로 네이밍 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생각이 없는 막무가내 악동 No brain이라 생각해서 미안해요 ㅋㅋㅋㅋㅋ)


이제 좀 친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어려운 그대의 이름은 영어입니다. 우리 사이는 대체 언제쯤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당신과의 사이에서 그저 편안함만 느끼고 싶은데 그게 제 욕심인가요? 나쁜 남자가 매력적이라고요? 에휴, 제 나이가 이제 마흔이에요. 이 즈음되면 이런 식의 밀당은 정말 하기 싫어진다고요. 믿기 힘들다고요?


Then, ask away anyone. This is a no bra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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