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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Mar 18. 2023

큰 피해를 피해갔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던 이번 화요일

2023년 3월 14일, 한국은 화이트 데이니까 사랑에 빠진 젊은 청춘들이 마음이 싱숭생숭한 하루를 보냈으려나. 미국엔 화이트 데이라는 건 없지만 내가 살던 동네도 그 날만큼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날을 보냈다. 아침에 핸드폰을 보는데 강풍주의보 메시지가 와 있었다. 홍수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호우주의보는 종종 받아봤는데 바람이 불면 얼마나 분다고 주의까지 해야하나......안일한 생각으로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햇볕은 따사로운데 바람이 정말 거세게 부는 묘한 날씨. 실내나 자동차 안에서 나무가 별로 안 보이는 창 밖을 보면 봄날 같은데, 멀찍이 나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면 비바람에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커다란 나무까지 휘청휘청거리는 날씨였다.


아이를 픽업하러 가야하는데 학교로 가는 큰 길가에 차들이 잔뜩 줄지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 사고가 난 줄 알고 다른 길로 돌아서 아이의 픽업을 서둘렀다. 근데 학교 가는 큰 길가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로 심상치 않게 차들이 막혀있었다. 알고보니까 바람이 너무 불어서 커다란 나무 가지들이 부러져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게 길을 막기도 하고, 교통체증을 피해서 다른 길로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자동차끼리 부딪히는 접촉 사고가 나기도 하고, 전기 문제로 신호등이 고장나서 교차로 진입에 혼선을 겪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터져있었다.


그 날 저녁 여기저기서 안부를 묻는 카톡이 많이도 왔다. 자기 사는 지역은 지금 정전되서 불도 안 들어오는데 괜찮냐고, 오늘 운전할 때 길이 너무 막히지는 않았는지, 혹시 거리를 지나가다가 뭐라도 쿵 떨어져서 다치는 일은 없었는지 등등. 다행히 우리 집은 정전이 되지 않아 안부를 묻는 분께 '저희는 큰 피해는 피해갔어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같은 글자인데, 하나는 손해를 보는 피해, 다른 하나는 피하다의 피해, 뜻이 너무 다른 것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게 재밌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파트 4-5층 높이정도 되는 유칼립투스 나무들. 뿌리뽑힌 유칼립투스 나무 두 그루 옆에 몇 그루 더 남아있다;;;;;

피해를 피해갔다.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바람이 그렇게나 세차게 불어치던 화요일의 다음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얄미울 정도로 잠잠한 날씨였다. 다만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아이 학교로 가는 큰 길가의 한켠에는 당시에 큰 소동을 일으켰을 나무 두그루가 눈에 띄였다. 이 지역에는 우듬지가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이 꽤 많은데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무라 불리는 레드우드도 있고 오일의 이름으로 익숙한 유칼립투스 나무들도 있다.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을 일으켰던 녀석들은 바로 후자인 유칼립투스 나무 였고,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들이 힘없이 뿌리 뽑혀있는 걸 보고 뜨악했다. 땅이 평지가 아니라 경사가 져 있어서 뿌리가 단단하게 자리잡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커다란 나무가 바람 때문에 도로 위로 내팽개쳐질 순간을 상상하니 아찔해졌다. 내가 운전자였으면 심장마비 걸렸을 듯....;;;


유칼립투스 나무만큼은 아니지만 맞으면 꽤나 아플 묵직한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에 부러져 있고, 신호등을 고치느라 자동차가 길게 줄지어선 교차로도 곳곳에 눈에 띄였다. 듣기로는 여전히 전기가 복구되지 않아 힘든 분들, 특히 식당을 운영하시는 영세민들이 많다고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칠 자연 재해, 다음에는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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