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셀러 작가님의 작업 기밀이 궁금하여 책을 주문하였지만 나는 사실 작가님이 쓰신 '불편한 편의점'을 아직 읽지 않았다. 지인이 읽고 넘겨준 종이책이 떡 하니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삶의 여러 문제로 어려워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에 이미 내가 삶의 여러 문제로 어려워하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게 뭐가 더 궁금할쏘냐 싶어서 손을 뻗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읽어야 하는, 좋은 책들은 이미 내 시간의 바구니를 넘쳐서 쏟아져내리는 상황이지 하지 않은가.
내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오래도록 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에 수십 번씩 거실에 놓인 책장 앞을 오고 갈 때마다, 심지어 온라인 세상으로 눈을 옮겨와도 내가 자주 이용하는 리디셀렉트의 Top 20 순위권을 몇 주 내내 지켜내면서 나의 시야에서 계속 어슬렁거렸다. 리디셀렉트 순위권 안의 책들을 보면 인기 많은 책들은 리뷰 개수가 보통 몇백 개 정도인데 이 소설책은 무려 4000개를 넘어서 있었다.
대체 어떤 매력이 내 선택을 받지 못한 이 소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어렴풋이 궁금해했지만 (나중에는 약간 오기로) 꿋꿋하게 읽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지난달 독서 모임에서 읽어야 할 책이 E-book으로 출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랴부랴 종이책을 주문하던 중 <김호연의 작업실>을 마주치게 되었다. 올드보이 버전으로 이런 말이 마음에 떠올랐다. 누구냐, 너.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온 김호연 작가님의 책을 읽는 중이었다. 요즘 나는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기도 하다. 이 전에도 써놓았지만 나는 갈등회피주의자인데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큼 궁금한 사건/갈등을 만들어내야 하고, 나는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해 남들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는데 사람들을 관찰해서 그럴싸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라고 하니 이런 내가 진짜 작가해도 되나 싶은 회의감이 들던 차였다.
그러면서 지난주에는 곧 생리가 터지려는지 툭하면 울고 자빠지고, 초반에는 틱틱으로 시작하다가 후반에는 신랑이랑 투다다다다 싸우고 마는 에피소드를 하루 걸러 하루로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나와 의견이 맞지 않는 누군가와 싸우고 눈물을 쏟고 같은 공간에서 다시 마주쳐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서 다시금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다.
원망은 조금 전에 일어난 다툼에 그치지 않고 후회로 가득해 보이는 과거라는 호수 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빠르게 퍼져나간다.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지지부지한 지난 몇 년, 필요도 없는 가방끈만 길지 경제적으로 빠싹하지 못해 집도 장만 못하고 신랑 내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어리바리 새댁에서 여전히 어리바리한 두 아이의 엄마로 오기까지. 분명 나의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건만 남 탓....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님을 탓하고 싶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이렇게 나를 광야에 내버려 두냐고.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신이라면서 코 앞에 있는 가나안 땅에 그냥 휙 들여보내주면 안 되냐고. 기도로 소리쳐 묻는데 하늘에서 빛과 함께 내려오는 성스러운 음성이 들리진 않았다. 근데, 오늘 아침 신앙 서적도 아니고 자기 계발서에 가까운 <김호연의 작업실>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공감 가는 캐릭터를 쓰기가 힘이 드는가?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얼마나 공감하며 사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바란다. 상대방의 마음을 쉼없이 헤아려보기 바란다. (p.95)
아, 내가 자기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이었구나!라는 깨달음에 뒤통수를 한방 제대로 맞은 것 같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을 지키느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예수님마저 죽였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알면서도 나의 일상은 딱딱한 '율법' 문제랑 다르지 않은가?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과 다르다고 착각했다.
근데 신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득바득 싸웠던 것도 공감 가는 캐릭터로 이야기를 써내지 못한 것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같은 문제였다는 사실이 깨달어졌다. 하나님께서 대답을 주셨으니 이제는 실천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한번 더 힘을 빼고 주님을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45mm, 심지어 오른쪽은 240mm 짝짝이로 자라 버린 내 발은 모든 신발에 들어가지 않을 테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작고 볼이 좁은 신발에도 내 발을 넣을 수 있고, 한평생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신발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춤을 출 때도 신발이 중요하지 않은가. 발레할 때는 토슈즈를, 힙합할 때는 운동화를 신어야 하듯 그 때 그 때 필요한 신발을 찾아내고 신어내야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신발 신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쩌랴, 어떻게든 신으라는데 순종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