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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Jul 10. 2024

철썩철썩 살아 날뛰는 파도 같은 한 여자

그런 그녀의 삶이자 소설, 박서련 장편 소설 <체공녀 강주룡>

몇 주전에 코로나에 걸려서 몸살로 뻗어버렸다. 죽을 듯이 아픈 몸살로 이틀 뒤, 뒹굴뒹굴 격리의 시간이 따라왔다! 후후후, 여전히 검사를 하면 코로나 양성이니까, 나의 못된(?) 병을 가족들에게 전염시킬 수 없다는 정당한 이유에 따라 나는 당당하게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엎드려서 리디 셀렉트를 둘러보는데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체공녀 강주룡> 


어렸을 때 소공녀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체공녀는 뭐람? 작가는 박서련. 이 작가님의 또 다른 소설 <마법 소녀, 은퇴합니다>를 읽었을 때 나의 브런치 필명 단서련이랑 이름이 같아서 기억이 났다. 게다가 <마법 소녀, 은퇴합니다>는 내가 애정하는 정세랑 작가님의 <지구에서 한아뿐> <보건교사 안은영>, 이유리 작가님의 <브로콜리 펀치>결이 비슷하여 휘발하지 않고 마음에 남아있는 소설 중 하나였다. 현실에 발 딛고 있지만 엉뚱하고 기상천외한 설정이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환상 소설들. 내가 사는 세상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고 구석구석 낄낄대며 읽을 수 있는 유머가 살아있는 환상 소설들을 좋아한다.


멋진 언니들의 카리스마....라고 쓰려는데 둘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인 듯 ㅎ


표지만 보면 <체공녀 강주룡>의 첫인상은 환상 소설 특유의 가벼운 웃음을 쫙 뺀 듯했다. 이슬아 작가님의 <가녀장의 시대>에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의 여자 자화상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뭔가 왁자지껄하고 유쾌함이 묻어있어서 가볍게 책을 펼쳤건만..... <체공녀 강주룡>의 표지는 강렬한 보라색 배경 옛 여인의 진지한 눈빛에 쭈그리가 되어버렸다. '당신 왜 실없이 웃고 있소?'라고 무언의 질문을 던지는 듯한 묵직한 표정...... 너무 무거우려나 싶어서 피하려다가 그래도 한겨레 문학상, 큰 상까지 받은 작품이니 한번 읽어보자 하고 파일을 열었는데 이게 왠 걸?! '오래 주렸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강녀의 머리가 허공에 호를 그린다.'로 마치는 짧은 에필로그를 읽고 본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되려나.......?!


현실에서 나는 격리를 하면서 작은 공간에 갇혀있었지만 책을 읽으며 엄청난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 전통과 현대 문물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1920년대, 일상의 공기가 나 같은 겁쟁이는 숨 막혀 죽을 거 같은 긴장감 머금고 있는 일제 강점기로, 평양을 포함하여 밟을 수 없는 땅들을 향해 날아다녔다. 이틀 만에 후딱 읽어버린 게 너무 아까울 지경이었지만, 오랜만에 주인공에게 몰입하여 후루룩 읽었다.


어렸을 때 나는 삼일절과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총을 맞으면 죽는 게 무섭고, 콧수염난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 고문당하면 당장에 비밀을 내뱉을 거 같은 내 주둥이. 그런 내가 과연 국기 하나를 손에 들고 용감하게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내 안위를 걱정하며 우물쭈물 고민하는데, 망국의 설움을 품고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의 물결이 밖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들을 끌고 나가는 리더들의 힘찬 손길에 따라 높은 파도 마루가 생긴다. 바닷가의 모래 한 돌 같은 나, 모래사장 앞으로 돌진하는 파도에 내 마음이 어지럽게 휩쓸어진다.


파도에 맞은 들 여전히 나는 모래 알갱이로 살아간다. 남에게 피해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안위에는 관심 없이 살아가는 개인주의, 아니 콕 찝어서 말하자면 참 이기적인 년. 대학교에 가서도 강의를 들으러 혹은 데이트를 하러 바삐 걸음을 움직이는 동안, 등록금 인상 반대를 외치며 삭발을 하고 고공농성을 하는 학생회를 나 몰라라 지나치기 바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의 양심은 나를 찔러왔던 거 같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그렇게만 살면 안 된다고....... 파도에 올라타 바다라는 큰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이 소설의 실존 인물인 주룡을 비롯하여 신념을 가지고 두려움을 이기고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들, 파도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그들의 삶에 귀가 열리고 눈이 간다. (고문이나 폭력은 여전히 무섭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한 잡지 <동광>  23호: 책에는 한 페이지 더 있다.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실제 사건과 인터뷰 녹취를 읽어볼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마지막에 보면 작가님이 수집한 자료 목록과 함께 실존 인물이었던 주인공 강주룡을 인터뷰한 잡지 <동광> 23호 기사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총 3페이지에 걸쳐 나온 기사였는데 핸드폰 화면에 나오는 깨알 같은 글자를 읽을만한 크기로 줌인하여 한줄한줄 읽어보았다. 군데군데 한자가 있고, 북한 말씨로 인터뷰를 기록했지만 읽어보면서 내용 파악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지붕 위에서 투쟁이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

체공녀(滯空女) 공중에 머무른 여자. 기사의 상단에는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앉아있는 강주룡의 사진이 실려있다. 기사를 보면 소설에 나오는 사건들이 생각보다 아주 세세하게 나와있다. 늦깎이 결혼을 하고 연하의 '귀여운 도련님'같은 남편을 따라 독립운동에도 참여했고 '손까락을 잘라서' 핏물을 마시게 하며 간호했던 죽을 고비에 있는 남편을 구해내는 극적인 장면, 시댁에서 의심받아 일주일을 꼬박 굶어야 하는 옥살이도 했다가 (여기 인터뷰에서 이미 일주일이나 굶어봤는데, 을밀대 위에서 '사흘쯤 단식이야 쉽지 않아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주룡의 말도 나온다.) 평양으로 건너가 고무공장 노동자로 살며 자매들의 인권을 위해 운동가로서 고공농성과 단식투쟁하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던 연설문 하나하나. 인터뷰에는 20세기 초 옛사람, 북부 지역 사투리, 그리고 강인한 여성으로서의 강주룡의 말투가 잘 나와있다.


그다지 상상력이 폭발적이지 않은 작가 지망생으로서 이런 소설 같은 삶을 살아간 실존 인물 기사를 찾아낸 작가님이 너무 부러웠다. 실제 사건인데도 마치 허구 이야기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듯이, 사건의 개연성 시간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등장인물의 개성도 렷하다. 물론 역사적 자료들 위에 살을 붙이고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작가의 역량에 크게 의지하지만 이런 좋은 재료, 뼈대를 발견했다는 게 너무 부러웠다.


파도처럼 철썩이는 강주룡의 삶이 여운으로 남아 작가님의 또 다른 책들을 검색해 봤는데 최근 출판작으로 <카카듀>라는 작품이 나왔다.(체공녀 강주룡은 2018년 출판이라 아주 최근 작품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국인 최초 서양식 카페였던 <카카듀>, 망국의 청년 예술가들이 모이는 아지트라는 설정이 이미 너무 매력적이다. 이번에도 카카듀 카페를 만든 영화감독 이경손, 그리고 그/삼촌을 도와 함께 카페를 창업한 현미옥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영어 이름은 현앨리스)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 흥미로워서 이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음 블로그 글에서 자세하게 정리를 해놓았고, 정병준 교수의 2015년 출판책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책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들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박서련 작가님의 짧은 자기소개 글을 보면 '일기와 박물지'를 쓴다고 하는데 박물지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이처럼 좋은 소재를 잘 찾아내는 밑바탕이 되었을 거 같다. 나는 상상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데 모든 걸 내 머릿속에서 창조해 내는 판타지 혹은 SF 보다 역사 소설을 공략해 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흙 속 진주 같은 흥미로운 소재를 찾고 그에 관련된 자료조사를 철저히 하고 나면 사건이나 인물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작가에 대한 의존도가 조금 줄어들기 때문에...... ^_^; 앞으로 고서라던지 신문 기사나 잡지나 연구 관련 글 등등 독서의 폭을 넓혀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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