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이사를 가도 좁디 좁은 서울 한복판 어딘가였다. 대학도 우째저째 인서울에 성공하여 자취를 할 필요 없이 서울에서 20년 넘게 지내왔다. 그러다 2007년,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야 했다.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어른도 아니고 소녀도 아닌 만 22살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버린 판. 언어도 힘들고 생활도 힘들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족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거세해버린 듯한 심리적 압박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불치병 선고라도 받은 듯이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타지에 나와 살게 된지 13년(!!!)이 지나버린 지금은 예전보다는 좀 더 자연스럽게 나와 가까운 가족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물리적 떨어짐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성격상 사람과의 떨어짐이라는 건 지금도 여전히 달가운 일이 아니고 가끔은 일상이라는 파도를 잘 버텨내고 있는 내 마음에 잠수종을 억지로 매달아놓은 듯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다.
생각해보건데, 70-80년대에 이민 오신 부모님 세대에 비한다면 지금은 감히 “이별”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감사한 나날들이다. 옛날에 비해 한국행 비행기도 많아져서 (여전히 비싸긴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는 태평양을 건너가는 게 훨씬 수월해졌고, 물리적 육체적으로 멀리있을 뿐이지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저렴한 영상 통화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안부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과 글들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면서, 때로는 알듯 모를듯 흘깃흘깃 쳐다보기만 하면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내 마음을 매몰차게 끊어내지 않고도 그 이음새를 엉성하게나마 여태껏 이어올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2016년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조금 희한한 경험을 했다. 시간 순서로 보자면, 일단 내가 2012년에 결혼할 때 고모와 고종사촌 성호오빠네 부부한테 인사를 드렸다. 그 뒤, 2013년 도련님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다시 들어가면서 아빠랑 같이 고모네 옷 가게에 들려서 때마침 가게에 나와 계신 고모부까지 두 분 얼굴을 뵙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이 내가 볼 수 있던 두 분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두 분 모두 건강했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이듬해 2014년 10월에 돐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갔는데 출산 후 처음으로 친정집에 들어온 지라 몸과 마음을 요양하는 데에 집중하였고 첫 손주를 데리고 친정, 시댁 식구들, 이리저리 인사드리다 보니 금새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2015년 가을에 한번 더 한국을 찾아갔지만, 비슷한 이유로 친척들, 친구들 일일이 찾아보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마 이 당시, 혹은 이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부는 암투병이 시작된 듯 하고 고모도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치매가 오셨던 것 같다.
나의 일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시간을 따라 흘러내려갔다.
아빠의 누님인 고모는 형제들 중 가장 막내인 아빠와 나이 차이가 좀 있었기 때문에 고모의 아들 중 가장 막내인 성일이 오빠만 해도 나랑 최소 15살 정도 차이가 났다. 생각해보면 엄마 입장에서도 아무래도 시댁 식구인 고모보다는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훨씬 많고 몸도 마음도 더 친근한 친정 식구들, 이모와 외삼촌들과 더 친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겠지. 여튼 내가 기억하는 고모는 부엉이 같은 눈썹을 가졌던 고모부와 (다행히 부엉이 눈썹을 닮지 않았던 ㅋ) 고종사촌 3형제, 즉 네 남자를 카리스마로 휘어잡을 정도로 화통하고 쾌활한 여자였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촌 오빠들도 다들 너무 재밌었고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새록새록 생각나는 추억들을 곱씹어보면 미소가 올라올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서로 나이가 들고 각자의 삶의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치열하게 달려나가다보니 손을 마주잡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참으로 없었던 것 같다.
2016년에 언니가 여느 때처럼 카톡을 보내왔다. 고모부는 이미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엄마, 아빠와 함께 병상에 계신 고모를 한번 뵈러 갔다왔다고 한다. 뇌진탕 때문에 기억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살아 생전에 유독 예뻐했던 언니를 보자 제 정신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아들 셋 엄마로 평생을 살아온 고모는 딸을 낳은 언니한테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아들 낳았다고 하니까 아이고~어떡하냐고~ 했다고 ㅋㅋㅋㅋㅋ 언니에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도 돌아가셨고 고모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카톡이 왔다.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나의 일상은 흘러간다. 대부분 단조롭고 평화롭게. 삶이라는 나의 연극에 등장했던 소중한 사람이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일이다. 당분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연극을 계속 진행하면서 내 연극에 등장하는 사람이 분장실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저 멀리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얼굴이 안 보여도 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연이 영원히 끊겨버리는 바람에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세상은 뒤집어져 버리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함께 숨쉬며 살아있다는 믿음만으로 내 마음은 이리도 든든하였는데 멀어짐이 아니라 다시는 이어 붙일 수 없는 영원한 끊어짐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은 말도 못하게 먹먹해지곤 한다.
다행히 요 근래 이런 이별을 내가 직접 경험했던 건 아니다. 신경숙님의 소설을 읽었는데 등장 인물의 소중한 주변 인물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가는 부분이 있다. 제일 처음에는 주인공 정윤의 엄마의 죽음, 엊그제 읽은 부분에서는 미래 누나의 죽음, 어제 읽은 부분에서는 정윤의 소꿉친구인 담이의 죽음... 나의 일상은 똑같은데 (비록 소설 속 인물이긴 하지만) 어제는 살아있던 사람이 오늘 죽어있는 소식을 듣고, 그게 2번, 3번 반복되고 나니 죽음이라는 이별이 나의 삶에 다가오는 의미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 등장인물들의 죽음이 몇 년전 내 삶에 불쑥 찾아온 고모와 고모부의 죽음의 소식과 비슷한 성질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내가 구독하는 브런치 동료 작가님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지만 한편으로는 텅빈 공간을 바라보니 다시금 묵직한 돌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다.
나비효과의 반대 방향이라고 해야하려나......원래 죽음은 폭풍우처럼 거칠고 사납고 공포스러운 사건인데 태평양이라는 먼 길을 건너오면서 힘이 빠져 나비의 날개짓처럼 변해 내 일상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 같다. 폭풍우든 나비의 날개짓이든, 죽음이라는 차가운 이별에 살갖이 에이는 건 똑같은 것 같다. 나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조금은 밉거나 서운했던 사람들까지도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주었으면......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신경숙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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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올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개그우먼 박지선씨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저와 동갑내기인데다가 유쾌한 모습을 좋아해 맘으로 응원했던 분인데 너무 안타까워요. 바이러스보다 더 무시무시한, 무엇인가 상당히 뒤틀린 세상에 살고 있는 모두들......몸과 마음 건강하시기를 기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