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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Nov 09. 2020

조각과 수채화

제15회 삶의 향기 동서 문학상 수필부문 응모작

예전에 브런치에 올렸던 일기를 다듬어서 제15회 삶의 향기 동서 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맥심상을 받게 되었어요. (동서하면 역시 맥심?? :D 보리차 상이 있었어도 좋을 듯 하네요~) 앞으로 더욱 더 좋은 글 쓰라는 주님의 격려를 기억하기 위해 이 곳에 글을 남겨놓아요.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호랑이처럼 무서운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키가 작아서 교탁 바로 앞자리로 자리를 배정 받았는데 영화관 첫째줄에서 화면을 올려다보듯 선생님의 산만한 덩치가 더 과장되게 다가왔다. 말을 듣지 않으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겠다면서 내 짝궁, 나처럼 체구가 작은 남자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좌우로 휙휙 그네를 태우며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재밌지 않아 선생님의 눈을 피해 교탁만 바라보았다. 어리버리해서 들리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곤 했는데,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엄마에게 “선생님이 말을 안 들으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대!”라며 겁에 질려 하소연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것이 장난스러운, 그래서 재밌게 웃어넘길 수도 있는, 경고성 메세지라는 것을 알고있다. 엄마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어린 나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나는 그 말이 잘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쪽지 시험을 보는 날 일이 터졌다. 쓱쓱 답을 적어 내려가다가 문제 하나를 벽처럼 마주하게 되었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머리를 벽에 부딪혀 보아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정답이란 녀석은 끝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그날 따라 서랍 안 공책은 내가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공부하던 그대로, 180도 펼쳐진 채로 집어넣어져 있었다. 문제의 답이 어디에 쓰여있는지 알고 있기에 나한테 1.5cm 두께의 나무판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곧바로 답을 알 수 있을텐데……! 안타까워하며 실내화를 신은 발을 베베 꼬았다. 시각 장애인이 점자를 읽듯이, 손가락으로 정답이 쓰여진 종이 위를 훑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점점 커져서 호랑이 선생님에 대한 공포마저 삼켜버렸다. 컨닝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공책을 서서히 바깥으로 이동시키는데……


탁! 


선생님의 길다란 나무 막대기가 책상과 내 배 사이를 가로지르며 서랍에서 흘러내리는 공책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짓눌렀다. 공책 뿐만 아니라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머릿 속과 온 몸이 새하얘지다 못해 사라져버렸고 사람의 주먹만하다는 새빨간 심장만 남아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꿀렁꿀렁 움직이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듯이 몸 안에서 울려퍼지는 묘한 느낌. 그 때 내 표정은 생전 처음 느끼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아니면 선생님을 보고 공포에 질려 있었을까? 내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어쨌든 꽤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 내 얼굴을 본 선생님은 나를 창문 밖으로 내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반성문을 쓰고 부모님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말씀하셨다. 창문 밖으로 던져진다는 공포감이 사라지자, 자아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이런 나를 보고 실망할 부모님에 대한 죄송스러움, 태어나 처음 느껴 본 여러가지 감정들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당시 엄마는 학교 앞에서 작은 약국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만큼 무거운 약국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조제실을 지나고 온갖 모양의 약상자들에게 둘러싸여 엄마 앞에 섰다. 약상자들이 배심원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엄마는 판사가 된 것 같았다. 울음을 참아내느라 목구멍에 탁구공이 껴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고백했다. 그릇을 깨트린다던지 컵을 엎지른 것처럼 어쩌다 일어난 실수가 아니었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엄마는 어떤 판결을 내릴까? 다그침을 받을 수도 어쩌면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그런 실수를 다시 안할 것이라는 걸 믿는다며 품 안에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컨닝한 순간부터 약국에 오기까지 뱃 속에서 팔랑대던 나비 100마리와 울렁거림이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엄마는 그야말로 최고의 약사였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본인의 요동치는 감정의 바다를 잠재우고, 입에서 쏟아져내릴 듯한 조언 - 어쩔 때는 폭언 - 의 폭포를 막아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다. 그 작업을 착실하게 해내야만 부모는 상처받은 아이를 마주볼 때 가장 먼저 위로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의 새하얀 도화지 같은 마음에 인생의 선배인 부모가 좋은 뜻으로 섣불리 나서다가 종이를 구겨버리거나 찢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유학을 오기 전까지 나는 이런 부모님의 품에서 곱게 자랐다. “잘한다! 잘했어!”처럼 결과로만 평가받는 칭찬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격려, 선택에 대한 존중, 삶의 매 순간 숨겨진 보석을 찾는 겸손한 마음이 모두 칭찬이라 생각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나는 부모님의 아낌없는 칭찬 속에서 즐겁게 춤을 추며 자랐다. 온실 속의 화초가 예쁜 꽃을 피워내 듯 내 얼굴엔 어두운 그늘 한점없이 즐거운 웃음꽃을 만개하며 살아왔다. 그 긍정적인 에너지와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던 미소가 나의 성격이고 내가 가진 능력이라 자만했다.


2007년에 처음 미국에 왔으니 부모님 곁을 떠나 아둥바둥 살아온 지 10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미국의 깡시골에서 첫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한참을 달려나가야 장을 볼 수 있는 곳에서 나는 1시간에 1대씩 오는, 그리고 그 마저도 일찍 운행을 마감하는 버스를 타고 그 시간을 버텼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다시는 사고 싶지 않은 고생이었다. 그 때부터 유학생활, 이민생활, 결혼생활, 두 아이 육아와 네 식구 살림을 거쳐오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그 과정은 이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기쁨을 채워주기도 했고, 때때로는 기쁨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한 사람이 걱정 근심없이 웃고 말하고 먹고 자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섬김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절이 깨달았고 이제는 내가 그 섬김의 자리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종종 서글펐다. 또한, 한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옅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옆에 함께하는 상대방에게 많은 것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경청하는 귀와 존중을 담은 눈, 따끔한 충고를 하고싶어도 꾹 다물어내는 무거운 입, 그리고 너와 나는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한없이 넓은 마음이 필요했다. 누구보다도 멋진 나의 부모님이 오랜 세월 본을 보여주셨던 것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오고, 30년 넘게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이와 한 공간에서 숨쉬며 하루하루를 맞추어간다. 그리고 내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어린 생명들을 보듬으며,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을 거쳐내며 내 눈썹 사이의 안테나는 끊임없이 날이 세워졌다. 이제 나의 얼굴에는 곱게 자라온 젊은 시절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아니라 깊진 않지만 누가봐도 찌그러진 미간이 남아있다. 미소는 물이 쏟아진 수채화처럼 색이 희미하게 없어졌는데 파인 주름과 찌그러진 근육은 조각가가 신중하게 한땀한땀 파 놓은 것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신랑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식사를 하다가 나를 얼핏 쳐다보았는데, 특별히 자기나 애들한테 화내는 순간도 아니었는데 화난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있더라고. 그래서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화내는 것도 아닌데 머리를 굴리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진다. 신랑이 바라보았던 그 순간에도 별 거이면서도 별 거 아닌 가족들 식단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있었으니, 내일 아침과 점심에는 무엇을 해먹이고 또 다시 돌아올 저녁에 할 재료는 뭐가 있을런지 생각한다. 나는 당장 눈 앞도 버거운데, 내게 주어진 ‘주부’라는 이름의 예언자는 너무 멀리까지 내다봐야 한다. 메모리 딸리는 컴퓨터에 과부하 신호로 나도 모르는 새에 미간에 빨간불을 깜빡이며 살아가고 있다. 


마흔살이 되면 내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하는데, 그 무서운 순간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경각심이 들때마다 피곤함을 얼굴과 몸에서 떨쳐내보려고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다. 기본적인 육아와 살림에 겨우 내공이 생겼나 싶었더니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닥쳐와 아이의 학교 스케줄과 숙제 관리, 4인 가족의 24시간 공동체제를 관리하는 비서 직무가 얹혀졌다. 자가격리, 재택근무, 온라인스쿨이라는 새로운 일상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는 자만감이 들자, 이제는 캘리포니아의 초대형 산불이 연이어 일어나며 푸른 하늘과 간간이 해왔던 산책의 기회마저 무참히 빼앗겨 버렸다. 몸도, 마음도, 하늘도 채도가 낮아지는 요즘이다. 세월이란 뾰족한 못과 삶의 무게라는 무거운 정으로 가한 타격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을까? 도화지처럼 흰 종이에 글자를 하나하나 새겨가는 이 일에 희망을 걸어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얼굴에 다시금 웃음꽃이 만개하는 수채화도 그려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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