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0일 일기
오늘 세미나에 참석해서 처음 인사를 나눈 분이 계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 분은 아직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웃으면서 미국에 살면서 운전은 필수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이렇게 말한 나도 미국에 온지는 10년이 넘어가지만 사실 차를 운전하며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나 혼자 버틸만큼 버티다가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이를 달래면서 일정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는 게 정신적,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져서 마침내 포기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요즘에는 신랑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내가 주로 승용차를 쓰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 하나가 남한 면적의 4배이다. 같은 캘리포니아이기에 남쪽에 있는 LA와 내가 살고 있는 북쪽 샌프란이 대충 움직일만한 거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두 도시는 비행기로 3시간, 아이없이 스트레이트로 밟아서 운전에만 집중할 경우에는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이러다보니 이 땅에서는 뭐 하나 사려고 편의점에 나가고 싶어도 최소 5분 이상 운전, 자동차가 없다면 30분을 걸어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는 셈이다.
대도시를 제외하곤 대중교통도 변변치 않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젠가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 “자동차 운전”이 시작되긴 하였지만 내 마음에는 여전히 걷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어렸을 때 울 엄마가 걷기를 좋아해서 어린 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저곳으로 오래도록 걸었었다. 종종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걷기도 했지만 나는 결코 걷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걸음으로서 얻는 많은 것들을 더 깊이 사랑했던 것 같다. 함께 걷는 사람이 있을 때는 팔짱을 끼며 오손도손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 혼자 걸을 때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며 세상 구경 할 수 있는 기회, 발이 땅에 닿을 때의 진동, 눈부신 햇빛과 그림같은 구름, 숨통이 트이도록 시원하기도 때로는 살이 에이도록 아프게 스쳐가는 바람,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코로 도착하는 향기와 냄새들, 우수수 쏟아져 내려오는 물방울들을 피해 우산 속에 숨어 빗소리에 귀 기울이는 재미 등등...... 어쩔 수 없이 걷기와 다소 멀어진 지금 돌아보건데, 걸음은 운전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 나의 청춘에 아주 가깝게 맞붙어 있는 것 같다.
괜시리 걷기를 더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자동차 운전이 나에게 큰 편리함을 주긴 하지만 내가 사랑한 낭만들을 무자비하게 앗아가버린 느낌을 주어서다. 특히, 운전하면서 적응하기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느긋하고 얼빠진 내 성격과 달리 운전석에 앉아있는 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는 점이었다. 사방팔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차멀미가 날 정도로 산만한 느낌이 들었지만, 분산된 정보를 하나로 통합해나가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적당한 속도로 함께 가는 차들을 비위를 맞춰주면서 사고나지 않게 양 옆 거리도 봐주고 가끔식 뒤도 한번 봐주고 멈춰야 할 땐 멈추고 가야하는 신호가 떨어지면 늑장부리지 말고 출발하고...... 너무나 정신없는 와중에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정신줄을 붙잡고 훈련에 임하는 시간이 한 6개월 정도 지나자 초반의 현기증이 날 정도의 긴장감은 조금 누그러진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 페이스북에 한번 신세 한탄을 한 적 있는데 서울에서는 댄스 클래스 듣고 나면 버스 정류장으로, 지하철 역으로, 서로 집을 향해 걸어가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기 미국은 어디선가 헤쳐 모였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주차장으로 흩어져서 나랑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시간이 줄줄 흘러갔다. 초코파이의 정이 뭔지 모를 사람들......ㅋ여튼 댄스 클래스 말고도 다른 많은 곳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겠지.
어렸을 때 누군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농담으로 두 다리를 11호 자동차라고 그랬다. 나의 11호 자동차가 아직까지 고장없이 잘 움직여주어 너무나 감사하다. 비록 지금은 4바퀴의 자동차에 많은 동선을 맡기고 있지만 아이가 좀 더 크고 나의 여건이 허락된다면 조금 더 많이 11호 자동차를 쓸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2020년 11월 20일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나라에서 198,537명이 확진되었다는 오늘
매일 집에 있는 나는 저 숫자가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11호 자동차 그리고 4바퀴 자동차도 쓸 수 없는 요즘,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