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나는 결혼을 하고 첫째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가방끈이 끊어지지 않았다. 90년대 초 국민학교에서 시작해서 지긋지긋한(으으으...) 대학원 졸업까지였으니 꽤나 긴 학창 시절이었다. 3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학생으로 살다보니 내가 사는 공간에는 언제나 학생의 필수품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컴퓨터를 번듯한 판에다가 올려놓고 장시간 앉더라도 허리가 편안한 가구에 앉아서 작업을 해왔다. 너무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고정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내가 그랬듯이 그럴싸한 책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 공간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으니 내가 쓰는 책상을 임시로 아이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1년 즈음 지났을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져서 학교 수업은 집에서 진행되기 시작했고 책상의 원래 주인은 틈틈이 뺏어쓸 기회를 빼앗기게 되었다. 내 책상을 아이에게 완전히 넘기며 나는 소파로 가서 랩탑(노트북)을 정말 랩탑답게 쓰게 되었다. 하지만, 집중이 될 만하면 허벅지가 불타올라 식탁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그리고선 하루에 최소 3번, 식탁이 본업에 충실해야하면 또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내 컴퓨터가 놓여있는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때 그 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옮겨다니며 아줌마의 정신머리로는 이 녀석이 지금 어디 있는지 바로바로 추적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글쓰기 작업의 유목생활 - (주의) 아시죠? 평소에는 이런 상태 아닙니다. 지금 밤이라서 치워놨어요.
책상과 의자로 대표되는 나의 고정관념은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주어졌을 때에만 작업에 착수한다는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제는 뉴노멀의 시대이다. 재택 근무를 하는 한 남자의 아내로, 내년 봄학기까지 집에서 학교 수업을 듣는 6세 아이와 쉴 새 없이 세상을 탐험하기 시작하는 2살 아기,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내가 원하는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욕심임을 절절이 깨달았다.
다행히! 욕심은 버렸지만, 글쓰기에 대한 갈급함은 버리지 않았다. 목 마른 자는 물을 찾는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하루 중 내 손이 자주 닿을 수 있는 곳,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곳에서 틈틈이 작업을 하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그 곳은 바로 내가 가족들을 위해 식사와 간식과 물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부엌이다. 발상을 전환하고 보니 부엌의 찬장은 창작의 아이디어를 수 놓을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화이트보드가 되었고, ㄷ자 모양의 부엌은 내가 요리를 하면서도 틈틈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완벽한 디자인의 책상이 되었다.
고백하는데, 지금 이 글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밤에 식탁에서 쓰고 있다 (크흑! 오롯이 방해받지 않는 내 시간이 좋긴 좋다!! 너무 좋아!! 최고 최고!! 엉엉엉!! ) 하지만 이번에 쓰기 시작한 단편 소설의 꽤 많은 작업을 부엌에서 하고 있다. 책상 위에 포스트잇을 준비해두고 생각날 때마다 캐릭터 설정이나 대사 아이디어를 적어두고, 계란을 삶거나 잠깐 한눈 팔아도 되는 요리를 할 때 틈틈이 컴퓨터 쪽으로 와서 아이가 낮잠자는 동안 썼던 글을 퇴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실에서 시작된 소설을 꼭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야 앞으로도 이 작업실에서 마음껏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림이라는 일도, 글쓰기라는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