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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왕국으로 일탈

3월 - 스노 보드

by 단서련 Mar 23. 2025

엘사를 만나러 디즈니 랜드를 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군 ㅎ) 내게 있어 겨울왕국으로 일탈은 스노 보드를 타러 가는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 지난 7년간 스노 보드를 타러 가도 3년에 한 번 꼴로 깨작깨작 타니까 참 한결같이 슈퍼 왕초보 자리에 머물렀다. 작년에는 (큰맘 먹고!) 중고 보드와 부츠를 장만하고 장비를 뒷좌석에 넣고 원하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커다란 사륜구동 승용차까지 ㅋㅋㅋ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리조트에 자주 찾아갈 수 있도록 캘리포니아에 있는 몇몇 리조트가 커버되는 캘리 패스를 (큰맘 먹고!!) 구매한 뒤 내 생일 선물로 보드 개인레슨 받기로 계획해 두었다. 


지난해 12월 리조트를 찾아가 중고보드 (근데 바인딩이 Flow라는 브랜드인데, 보통 바인딩처럼 뒤 하이백 고정된 게 아니라 스트랩을 고정시켜주고 하이백은 딸깍! 클릭하는 형태였다.) 첫날은 아무런 문제 없이 그럭저럭 지나갔는데 조금 교만했던 건지 막상 레슨을 받으려던 둘째 날 첫 번째 라이드에서 엉덩방아를 아주 세게 찧어 꼬리뼈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갔다. 통증이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아주 심각 ㅠㅠ 아마 인생 동반자될 듯......


스노 보드를 다시 타기가 두려울 정도로 트라우마를 남긴 사고였지만 40살 아줌마가 된 나는, 트라우마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시즌권 아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난 2월에 아들님과 함께 개인 레슨을 받으러 눈 덮인 리조트를 찾았다. 12월에 갔던 곳이 혹시 설질이 안 좋고 얼음길이라 그런지 싶어서 다른 리조트를 방문했고, 처음에 중고보드에 설치해 놓은 Flow 바인딩도 스트랩을 조절하는 Burton 바인딩으로 바꾸었다.


감사하게도 새로 방문한 리조트에서 개인 레슨을 잘 받았다. 리조트 문제인지, 바인딩 문제인지 원인 파악은 안 되지만 이번 3월 롱위캔드에 다시 한번 같은 리조트를 방문했다. 개인 레슨을 해주신 스노보더는 올해 65세가 된 할아버지였는데 우리가 리조트를 다시 방문할 예정이라고 연락드렸더니, 레슨이 없는 날이라면서 흔쾌히 우리들과 함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초급자 코스를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엉거주춤 엄마를 내버려 두고 혼자 초고속으로 활강하려는 아드님과 함께인 엄마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ㅋㅋㅋ멈춰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계속 My son, you gotta take care of your mom. 강조하신다 ㅋㅋㅋ


초보 보더, 아니... 나는 리프트 의자에서 넘어지지 않고 내려오는 것부터 일이다. 이제야 살짝 슈퍼 왕초보를 벗어나 리프트에서 내려올 때 10번 중 7번은 넘어지진 않고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어어어어어어 어~ 소리치며 엉거주춤 멈춰야 하는 초보 보더이긴 하다. 내가 느끼기에는 나름 빠르게 질주하는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할머니 같은 속도로 보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연습하며 내려온다. 중간중간 나의 온 사방으로 스키어들과 보더들이 엄청난 속도를 즐기며 내려온다. 그렇다, 나는 연습하고 그들은 즐기며 내려온다.


보드를 타면서 초보 시절의 자동차 운전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단 10분 거리라도 운전대를 잡으면 온 신경이 곤두서서 - 아직 대로변에 접어들지도 않았는데 ㅋㅋㅋ - 정신이 혼미해지고 운전을 마치면 진이 다 빠지곤 했다. 힘들고 무서워도 계속하다 보니 이제는 음악을 들으며 가고 싶은 리조트를 향해 편도 3시간 거리를 도전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해졌다.


40살이 넘어 배우게 된 보드도 비슷할까나? 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다 보면 편안한 라이딩이 가능해질까?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데 내 옆으로 길처럼 보이지 않는 낮은 언덕 배기가 있었다. 노련한 스키어들과 보더들은 무리를 지어 일부러 그 방향을 향해 질주한다. 놀이동산인 거 마냥 재주를 뽐내며 길 같지 않은 길을 따라 점프를 해댄다. 얼굴을 헬멧이랑 마스크로 다 가리고 위험을 즐기는 모습 때문에 그들은 모두 10대, 20대처럼 젊어 보인다. 사실은 우리 선생님처럼 60살이 넘은 할아버지일지도 모르지만. 까르르 웃으며 스릴을 즐기던 이들이 신기루처럼, 멈춰버린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기 전, 교회에서 친해진 자매와 잠깐 스노 보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보드를 조금 탈 수 있다고 수줍게 웃던 그 친구의 입에서는 얼굴에 떠오른 수줍음과는 영 딴판 말이 튀어나왔다.


"미친듯한 속도감이 너무 좋아요!"


미친듯한 속도감, 그 대답에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겨울 스포츠 하나 정도는 하기를 바래서, 나도 운전만 하기보다 리조트에 간 김에 같이 액티비티를 즐기고 싶어서 도전했다. 스키가 처음 시작은 아주 조금 쉽겠지만, 스키나 보드 둘 다 어느 정도 사고 위험 있기는 마찬가지고 둘 중에 라이딩이 좀 더 멋져 보이는 보드를 배우기로 결정했다. 상황에 따라 선택한 거라서, 겨울 스포츠의 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를 못한 거 같다.


마침 내가 발길 닿는 곳이 강남역이었고, 사람들이 길게 줄 선 맛집이라 줄은 섰는데 이 음식이 어떤 점 때문에 맛있는지를 모르는 거라고 할까? 사람들이 굳이 3시간 운전까지 해가며 저 멀리 리조트를 찾아가는 이유는 뭘까. 불닭집의 묘미는 미친듯한 매운맛이듯, 설렁탕집의 묘미는 뜨끈한 국물(+깍두기 맛)이듯, 보드의 묘미는 바로 단조로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미친듯한 속도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상이 흘러간다. 아이들 학교와 방과 후 활동, 그 사이사이로 파트타임 티칭과 풀타임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가 빼꼭하게 끼여있다. 그 일상은 오늘도, 어제도, 엊그제도 똑같았다. 아주 조금의 변주가 있지만,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지지지난주에도 비슷했던 거 같다. 감히 예측하건대, 주변 엄마들의 삶도 비슷해 보인다. 집에서 살림을 하고 밖으로 나와 아이들의 스케줄에 따라 로봇처럼 운전한다. 그것이 무한에 가깝도록 반복돼도, 삶의 무게를 묵묵하게 견뎌내는 게 부모의 당연한 몫이라는 듯 모두들 담담하게 살아간다.


북부 캘리포니아의 눈 덮인 리조트는 참 환상적이다. 겨울 왕국 안으로 빠른 속도와 거친 움직임을 선보이며 가면(헬멧과 마스크)을 쓴 사람들, 스키든 보드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도록 잘 타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애들 학교에서 물어보면 보드 타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막상 리조트, 게다가 이 지역에 규모 있는 리조트가 10개 정도는 되는데 일탈을 즐기고, 그 일탈을 반짝반짝 빛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게 참 신기하다.


벌써 3월 말이다. 4월 20일까지 오픈 예정이라고 하던데, 따뜻한 봄날에 다시 한번 더 겨울 왕국을 갈지 고민 중.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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