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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환상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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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Jul 30. 2020

지하철을 타고

2019년 2월 꿈

지하철이 들어오는 요란한 소리는 마치 익숙한 알람소리 같다. 천천히 가도 되는 날조차 그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재촉해서 서두르게 된다.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 올라가보니 승강장이 마침 둘로 나누어진 역이었다. 어느 쪽 기차를 타야할지 갈팡질팡하면서도 내가 타야할 기차를 이성적으로 맞춰보려고 단서를 찾고 있는데 마음이 바빠서인지 다음역 이름이 입술로 읽혀져도 머리 속으론 들어오질 않는다. 확률은 어차피 50대 50이니까 ‘에라이 모르겠다~’하고 오른쪽 승강장의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꿈이라는 게 참 웃긴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지난 10년간 주로 이용했던 3호선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서인지, 고개를 들어올려 지하철 노선표에서 수서역 방면이 맞나 확인하고 있었다. 수서역은 원래 오른쪽 하단에 위치해야하는데 이 세계의 수서역은 오른쪽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콩나물 시루처럼 끼어서 고개를 쳐들고 눈에 익숙하지 않은 이 세계의 지하철 지도를 읽어보려고 애쓰는데 알록달록 선들이 이리저리 뒤엉켜있고 글자도 너무 작고 심지어 영어에 한문까지 쓰여있으니 매직아이가 따로없다. 정신을 집중해서 눈을 사팔뜨기로 뜨고 지도를 쳐다보니 내가 내려야 할 역이 튀어나왔다. 감사하게도 내가 내려야 할 역을 알아챘지만 내가 탄 지하철이 반대로 가는 지하철이라는 것도 깨달아서 다음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열리는 문으로 헤쳐가야만했다.


나는 왼쪽 문에 서 있었지만, 내려야 할 문은 반대쪽이었다.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면 고작 대여섯 걸음이면 될텐데, 빽빽하게 끼어있는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마음이 초조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말이라도 미리 맞춘 거 마냥 무채색 옷을 입고 있는 승객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에 따라 그들의 새까만 머리칼도 같이 휘청거렸다. 그것이 헤쳐나갈 파도처럼 느껴져서 그런지 앞으로 걸어나간답시고 버둥거리긴 하는데 문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 내려야 할 역은 다가오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도달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역간의 평균 거리는 2분이라는데 마음이 불편하니 그 짧은 순간이 2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기차가 역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도 그 틈에 끼어 몸이 붕 떠버린 채로  지하철 구멍 밖으로 쏟아져버렸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야하건만 파도를 거스르느라 지친 몸을 추스리면서 지하철 역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역에서 나왔는데 그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검은 파도를 헤쳐나온 걸 보면 분명 악명높은 한국의 만원전철이었을텐데 나는 그 강을 보면서 템즈강이라고 느꼈고 안개가 끼어서 희미하긴 했지만 저 멀리에는 타워 브릿지가 보인다고 느꼈다. 나는 태어나서 영국에 가 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한국의 지하철을 타고 런던에 도달한 나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다음 지하철이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역에 서있는 나를 지나쳐 차례대로 우산을 팡!팡!팡! 열더니 메리포핀스처럼 강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모습이 평화로워서 하염없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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