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중력을 이기지 못하나
시몬 베유의 <중력의 은총>을 읽었다. 각 구절마다 가슴이 뛰어 밑줄을 긋는다. 하지만 책을 덮은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밑줄을 그은 것은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인데, 책을 덮고 그 문장을 보고 있지 않은 눈은 어찌 기억 저 편 감은 눈인지. 세상 깊은 눈을 어찌 감고 싶겠냐마는. 아직 훈련이 부족한 탓에 인지가 짧음이라. 그저 지금까지의 오류와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나의 할 일임을 떠올릴 뿐.
말의 힘은 뻗어감에 따라 모순이 되고 아주 다른 힘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말했다는 착각.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말한다면 그것은 사건을 나열한 것(있는 그대로 있지 않은 그대로 말하기)이 아닌 평가의 말이 된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말하기를 해왔나. 나의 말이 이리저리 돌아 누군가의 오류의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나 또한 그 강력한 생각에 먹혀버린다. 지금은 나의 말을 옮긴 이와 거리가 생겼기에 할 수 있는 생각. 하다못해 그와 멀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나와 계속 평가의 말하기를 해왔다면 사태는 더욱 불행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불행은 계속되고 있지만.
나에게 강력하게 남은 생각과 그 경험은 내 안에서 풀어져야 한다. 다른 이에게 넘어갔을 때 나쁜 에너지로 발현되었다면 더더욱이 그 말하기는 그만둬야 한다. 얼마 전에 깨달은 생각이다.
관계성에서 긴장도를 높이지 않고 평범한 행동을 더욱 어렵게 다가가는 은혜를 나는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기억하고 기억할 것이다. 억지로 무언가 놓으려 하거나 억지로 무언가 만나려 함이 결국 평가와 판단을 낳는다. 나타나는 대로. 나의 오만함으로부터의 평가가 아닌 그저 의미 없음으로. 시몬의 말처럼 내가 사라짐으로써 당신과 신의 연결이 가능토록. 나의 빈 공간을 더욱이 만들고. 당신과의 거리를 더욱 넓힐 것임을. 당신과 함께 살고자 함을 거둘 것임을.
사회나 세상의 현상을 탓하기보다 모든 것의 잣대를 나에게 두는 것으로. 나는 말하기를 시작하려 함이다. 이 또한 엄청난 외로움과 두려움을 야기할 것임을 알기에. 홀로의 시간을 이미 글쓴이로 보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보내려 한다. 아무것도 거르지 않는 생각 받아쓰기는 나와 만나는 참된 시간이다.
시간이라던지 사랑이라던지. 찰나의 시간 경험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기억나지 않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앞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은 이기가 아니었나. 욕심과 소유가 아니었나. 스스로의 모순에 합리화하기 바쁘진 않았는가?
나에게 향하는 질문이 나를 다치게 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앞으로 나의 생각받아쓰기를 통해 정리정돈 해갈 것이다.
시몬 베유는 말했다. 지성은 정리정돈에 도움을 준다고. 이 생각받아쓰기는 앞으로 지성과 함께 쓰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나를 무너지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두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사랑. 그럼에도 나를 사랑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가장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만들어진 긴장 두려움이 아니라 진짜 나. 나를 마주하는 작업. 어떠한 삶을 외우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쓰기. 쏟아냄을 통해 발견하는 시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도 적어 내려 가는 것. 새삼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