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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꽃다운 그녀, 홍금순

큰삼촌이 2박3일 여행을 가고

할머니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내가 며칠간 할머니집에 와서 자기로 했다.


그러기를 3일차

95세 할머니와 하루종일 단둘이 폭염속에 집에 같이 있었다.

입맛없다,빨리죽고싶다,아유정말못살겠다,지겹다,지친다 X100000 무한반복

몸 움직이실때마다 아프다고 앓는소리 죽는소리

짜증짜증..

한번 말하면 잘 못 알아들으셔서 같은 말 최소한 3,4번 해야하고

고집은 또 왜이리 세고, 또 왜이리 내 눈치를 보느라

뭐 먹고싶단 말 한마디도 편하게 못 하고..

힘든 하루였다 ㅋㅋㅋ


강원도에 살던 유년시절 할머니와 함께 누워

머리맡에서 할머니에게 배운 민요와 트로트를 부르던 아이,

매일 할머니가 쓰시는 일기를 같이 읽으며 받침을 교정해주던 아이,

건강할때부터 늘 아프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사시던 할머니께

어디가 아프시냐 물어보고 늘 팔다리를 주물러주던 아이

제일 말 안듣는 막내딸의 막내딸, 막내손녀


그 아이가 자라 어느새 서른살이 되어

90이 넘은 노인이 부리는 고집과 짜증을 기어이 이겨먹으려 고집과 짜증을 부리는 어른이 되었고,

트로트도 민요도 더이상 듣지도 부르지도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며 일이 안 끝났다고 계속 콘텐츠나 만드는 멋없는 놈이 되었다.




생선은 내장과 뼈 대가리까지 씹어먹어야 제맛이라며

초등학생인 나에게 억지로 숟가락에 수북히 생선내장과 가시를 담아 먹이던 정정한 그녀

강원도 시골집에 와 늘 매년 농사를 도와주던 정정한 70세 노인은


어느새 90이 넘어

지쳐서 노래도 부르지 못하고,

노인정도 가지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밥을 삼키며,

손녀가 주물러주는 손길에도 다 소용없다고 아파죽겠다고 하는

노인이 되었다.



하루종일 꽁트가 따로없다.

선풍기를 틀고 이불을 덮고 자는 나를 그녀는 왜 더운데 이불을 덮냐며

"춥냐?"면서 선풍기를 끄고 방을 나가버린다 ㅋㅋㅋ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왜 덥게 문을 닫냐며 볼일을 보는 중에 벌컥 문을 연다.

(더웠다. 앉아있는데 땀이 난건 사실이다.)

컵라면을 간식으로 먹겠다는 내게 자기는 한젓가락 맛만 보겠다기에

2개를 끓였더니 죽어도 못먹겠다 한다.

엄마가 보내온 옥수수를 삶으신게 하나도 안 익었건만 다 익었다고 고집을 부린다.

밤에 운동을 나가겠다는 나에게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지마! 늦었어!" 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관절이 닳아 아플뿐

치매도, 오장육부 고장난 곳 하나 없는 우리 할머니는

본인의 하루루틴인 제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는 달리

여전히 오래 사실것만 같다.




손주들 중에서도 다른 손주는 그렇게 많이 보고 자란 적이 없는데

유독 언니와 나,

막내딸의 손녀들만은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때까지

늘 많이 보고, 먹이고, 재우며 키우셔서인지

여전히 다른 어떤 손주들보다 우리에 대한 애정이 강하시고,

전화도 일주일에 한번은 꼭 언니한테 따로 나한테 따로 하신다.

이사갈 집은 구했냐, 언니는 아직도 감기에 걸렸냐,

언니는 아직도 아프다냐, 직장은 잘 다닌다냐

그리고 늘 전화를 끊을땐 "사랑해 내 새끼들 감사하고 행복해" 라고 하신다.

10년이 넘게 들은 말이다.


이모들이 너네들 고등학교도 안가고 대학도 안가고

직장도 안 다니고 그러고 사는거 함부로 뭐라하지 않게

보란듯이 성공하라며

할머니는 매일 우릴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모들 보란듯이 부자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에게 정말 내가 돈 많이 버는게 1순위일까?

당연히 돈은 중요하다.

돈 많이 벌면 늘 뚜벅이로 할머니집에 오는게 아니라

자가용을 끌고 와서 한번도 보지 못한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할머니 먹고 싶은 거 다 사드릴 수 있으니까.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할머니 살아 계실때 핸드폰 한번 쳐다볼 시간에 할머니 얼굴 한번 더 보고

시간날때 할머니집에 한번 더 오고

할머니와 밥한끼 더 먹고

온갖 잔소리와 간섭속에 짜증이 나더라도 곁에 있으면서

할머니 곁에 내가 있단걸 알려드리는 거.

그거 라고 생각한다.


막내딸을 제외한 그 어떤 딸들도 할머니에겐 그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

할머니집에 오면 나와 언니가 차려준 밥을 앉아서 받아먹고

그릇하나 치우지않고 티비만 보다가 휙 가버리는 이모들과 달리


그게

내가 엄마를 보며 배운 부모에 대한 예의와 사랑이다.

우리 할머니가 낳은 천방지축 막내딸, 그 딸이 낳은 더더더 천방지축 막내 손녀인

내 역할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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