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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떠날 생각보다 머물 생각을 하자

스페인 워킹홀리데이 132일째

어느덧 호텔에서 엔터테이너 댄서로 일을 시작한지 2주째고,

주3일 수,목,금 진행하는 공연의 안무들이

익숙해지고

조금씩 요가, 아쿠아짐, 각종 엔터테이닝 게임들(빙고,양궁,다트 등등)

미니디스코, 키즈게임들을

배우고 진행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한국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에게 연락이 왔는데

(오랜시간 호텔에서 엔터테이너 댄서로 일해온 친구이고,

나에게 이 에이전시를 소개해주기도 한 친구다.)

곧 바하마스, 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등지에 호텔에서

일하는 에니메이션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내가 있는 호텔은 안무가 너무 지루하고

여기서 일하는 애들중 아무도 춤을 전공한 애가 없다고

너희 팀은 어떻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는 춤 레벨이 정말 높고 다양한 공연을 한다고

매일 열심히 연습해서 실제 자기 춤실력을

향상시키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솔깃한 나는 어떻게하면 너네 팀에서

일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링크를 보내줬다.


당장은 유럽에 머물며 스페인에서 돈벌며 지내고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엔터테이너 팀으로 움직이며

세계를 함께 여행하며 공연을 하는 것도 되게 멋진 일일 것 같았다.

어차피 에이전시는 유럽에 있어서

엄연히 따지면 유럽의 회사에 고용되어 중남미로 파견되는 거니까.

그 에이전시를 통해 워킹비자를 받으면

계속 유럽의 워킹비자는 유지한 채로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게 된다.



근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그란 카나리아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 와서 일한거 제외하곤 거의

돌아다니고 여행한번 제대로 못 해서

이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문화와 역사를 가졌는지 전혀 파악도 안된 상태다.


안달루시아에서 보낸 한달이 그랬다.

너무 짧아서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매력에 젖어들고

그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시간이 없었다.

내 느낌과 내 삶의 속도로는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1달은 진짜 찍어 맛 보는 정도로

택도 없는 시간이고,

최소 3달은 되야 현지인화가 조금씩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얼마 지내보지도 못 하고 중남미로 떠난다?

너무 정신없지 않을까?

또 이별하고 또 여행하고

지금 내가 그게 맞는 시간인가?

하지만 지금.. 이 섬이 나에게 너무 좁은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신청은 해보기로 했다.

여긴 유럽 특히나 스페인이다..

존나 느려터지고 게을러터진 인간들의 천국이다.

모든 일처리도 그런 식이다.


어차피 20군데 신청하면 15군데 연락 안오고,

3군데에서 떨어졌단 연락 오고,

2군데에서 붙는 수준이다.

내 이력서 문제도 아니고,

내 링크드인 문제도 아니고,

원래 이 나라 자체가 그렇다.

장담하건데, 스페인의 국민가수 로살리아가

어디다 이력서를 낸다해도 나랑 똑같을 수준이다.


신청한다고 다 붙는거 아니기 때문에

신청 자체를 망설이거나

내가 자격이 될까?

어쩔까 저쩔까? 겪어보지 않은 일에

미리 걱정을 갖다붙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일단 다 겪어봐야 하고,

부대끼고 살아봐야 배우고 알게 된다.


다만,

지금 나는 어디로 가는가?

성급하게 자꾸 떠날 생각만 앞서는 건 아닌가?

충분히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을 집중했고, 최선을 다 해봤나?

진짜 떠난다고 했을때 미련이 남을만한 건 뭘까?


그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반복해왔는데 잘 고쳐지지 않는 약점들,

내가 가진 강점들,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질문을 만들고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갑자기 중남미를 간다고 생각하니

이 곳에서 가족처럼 정말 가깝게 지냈던

이들과 너무 멀리 떨어진단 생각이 들었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늘 나의 발목을 잡는다.


전세계 어딜가나 정말 좋은 사람 다 있고,

어딜가도 누군가와 반드시 친해질거고,

함께 즐겁게 어울릴거고,

짜증나고 힘든 일들도 겪을 거고,

가족같이 가까워지고 할 거다.

전세계 어딜가나 정말 반드시 다 인연이란

나타나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만..

이런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을

한 곳에 오래 뿌리내리지 못하는 시간을

오랜 시간 반복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30대는 확실히 20대와는 달리

안정감이란 것을 스스로에게 잘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게 반드시 돈이어야 할 필요 없고,

애인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어디든 돌아갈 수 있는 곳,

머물고 사는 곳이 생기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한국에 있을땐 하나도 특별하거나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던

참으로 한국적인 것들이

1만리 먼 곳으로 떠나오니

참 고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듯이..


좋든 싫든 오랜시간 반복하고

함께한 시간은 엄청난 힘이 있다.

엄청나게 고유한 느낌이 있다.

마치 고향이 그리워 추억에 잠기듯이..

그런 아주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외국에 떠나와야만

한국이 객관적으로 보일때 느껴지곤 한다.


막상 다시 한국가면 그런 느낌따윈 삭 사라지고 없다 ㅋㅋ

더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하는 대상이 된 거니까.


오늘은 이래저래 의식의 흐름따라

헛소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조급하게 선택하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떠날 생각보다 머물 생각부터 해야

막상 정말 떠날때 미련이 남지 않는다.

현재에 집중하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떠나면 되는건데

아직 다 해보지도 않고 늘 자꾸 떠날 생각만 한다면

어딜가도 이것도 저것도

안 될거란 걸 느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나의 여행길에

직접 삶을 통해 깨닫게 되어 기쁘다.

백날 자기개발 책에 나오는 꾸준함 그릿이란

단어 머리에 쑤셔넣어봤자

몸으로 깨닫지 못하면 나의 것이 아니다.


몸소 경험하고 깨달아가기에

나다워지고, 고유해지는 중인 것 같다.


1, 혹시 중남미 호텔로 가는 댄스팀에 합류하게 되더라도,

2, 계속 그란 카나리아 같은 호텔에 머물며

내가 공연의 퀄리티를 높이겠다고 안무가가 되고

작품을 만들고 춤을 지도하게 되더라도,

3, 그게 잘 되는 팀이 아니라서 다른 호텔로 보내달라고 해서

좀더 빡센 안무가 있는 다른 지역 스페인 호텔에 댄서로 합류하게 되더라도.


어떻게 되든 다 괜찮을 거다.

뭘 해도 성장하고 성숙할 것이다.

다만,


언젠가 떠남과 머무름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가장 편안한 건

어떤 형태인지 알고 싶다.


머뭄과 떠남에 연연하지 않고

안정됨 속에 그 것들을 살아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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