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영은 어떤 마음으로 스스로를 애틋해 했을까
난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괜찮아지길 바랐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나는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요. 여전히.
- 드라마 <또 오해영> 중
드라마 <또 오해영> 방영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참 못나기도 하고 찌질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던 오해영. 평생 같은 이름을 가진, 더 예쁘고 잘난 친구 오해영에게 밀리고 치이는 삶을 살아왔던 오해영.
오해영처럼은 아니지만 나도 나보다 잘난 이에 묻혀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경험을 해보았다.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잘난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애틋해하는’ 마음이란 무엇인지 오롯이 공감할 수 없었다. 오해영은 생각보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자존감 높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또 오해영>이 방영된 지 어느덧 7년이 넘어간다. 나는 20대 후반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라는 사람을 더 많이 알아가면서 나의 좋은 면은 물론이고 못난 면을 계속 발견해 왔다. 나의 어떤 면은 너무도 싫어서 다른 사람처럼 되어보고자 시도해 본 적도 있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교환학생을 갔을 때, 새 직장에 들어갔을 때 등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새로운 환경에 가게 될 때마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포부는 매번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나는 항상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나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였다.
몇 번의 실패 이후 언젠가부터 나는 더 이상 그런 원대한 포부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오해영의 대사가 무슨 말이었는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때때로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하고, 그게 못 견딜 만큼 싫을 때가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이의 어떤 면이 좋아 보이고 본받고 싶을 때는 있지만, 내가 가장 응원하고 싶은 사람은 나 자신이다.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의 초라하고 찌질한 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것까지 사랑한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못난 면이 결국 나의 좋은 면이 되기도 한다는 걸 천천히 깨달았다. 못난 면과 좋은 면의 총합이 나다. 결핍과 결점 또한 나를 구성하는 일부다. 그것 없이 나는 설명될 수 없다. 결핍을 메우고 결점을 없앤다면 스스로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마저 없어지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나는 고지식하고 겁이 많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약하며 유연성이 부족하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고 원리 원칙에 위배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소한 선택을 할 때도 우유부단하고 무언갈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좀 더 가볍고 유연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올곧고 성실하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실하게 일한다. 편법을 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정면 돌파를 한다. 결정을 한번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몰라도 한번 신중하게 내린 결정에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다. 나는 올곧고 성실한 내가 참 좋다. 조금 고지식하더라도.
또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다.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해 충분히 알기 전까지는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속으로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까봐 거리를 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얼굴에 티가 많이 난다. 불쾌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해서 곤란했던 적도 많았다. 조금 더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실하다. 가식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며 스스로 가식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도 조금 서툴고 거칠더라도 진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솔직함에서 오는 유머를 좋아한다. 결국 진실함이 오래 살아남는 법이라고 믿는다. 나는 진실한 내가 참 좋다. 사람을 사귀는 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남의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쓰고 자주 흔들린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봐 전전긍긍하느라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저울질하다가 내 주관이 뭔지 헷갈릴 때도 많다. 이 말도 저 말도 맞는 것 같다고 쉽게 수긍한다. 나도 좀 더 줏대 있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기 객관화를 잘하고 다양한 의견을 쉽게 포용한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만큼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어딜 가나 평균 이상은 해내는 편이다. 여러 의견을 들어보는 걸 좋아하고 각자의 사정을 잘 이해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넓은 시야와 객관적인 눈을 가진 내가 참 좋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주 흔들리더라도.
다시 오해영의 대사를 보자.
대사에서 ‘애틋하다’는 단어가 쓰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워서 '애틋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두 가지 뜻이 있다.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와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의 뜻이 ‘애틋하다’라는 말에는 동시에 들어가 있다.
내 식대로 풀어보자면 애정이 가득하고 아끼면서도 어딘가 서글프게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섭섭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애정 없이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안타깝다는 건 결국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고, 그건 곧 응원과 지지의 마음이기도 하니까.
오해영은 단순히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조금 더 잘되고 괜찮아지길 바라는 응원의 마음으로 ‘애틋해’한 것이다. ‘내가 최고야’식의 나르시스트 사랑법이 아닌, 모나고 모자란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사랑법은 이런 게 아닐까.
누군가가 나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섣불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현재 모습을 그저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나를 향한 내 마음은 좀 더 복잡다단하다. 나는 오해영처럼 내가 조금 서글프리만치 안타깝고 섭섭하다. 나는 언제나 지금보단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응원의 마음이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한다면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오해영처럼 ‘애틋하다’라는 말을 쓰고 싶다.
나를 더욱 애틋해하고 싶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과도한 채찍질이나 자기비판의 방식이 아닌 애틋함의 방식으로 나를 응원할 수 있다면 나는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건강히 지켜내면서.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