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랑이라는 말, 너무 늦게

장례식장에서

by 소극적인숙


슬픔으로 가득 찰 거라 예상했던 장례식장은 뜻밖에도 활기가 넘쳤다.

영정 속에 웃고 있는 그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웃음을 터뜨리는 옛 동료들은 잔뜩 취한 채 벌겋게 달아올랐다.

장례식장 밖은 그를 그리워하는 동료와 지인들의 화한으로 빼곡했다. 빈소는 옛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지만 그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거라 생각이 든 수연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상주인 수연은 그들을 하나의 풍경처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얀 종이 위에 뭉개지는 수채화 물감처럼 조문객의 모습은 그리움과 애잔함으로 번져갔다.

수연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고인이 되었다.


남편 윤찬은 평소에 수연이 그리던 그림을 보는 걸 좋아했다.

"취미치고는 잘 그리는데? 이 정도면 화가 아니야?"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볼에 입을 맞추던 사람이었다.

“떠오르는 데로 가볍게 스케치해서 완성되지 않아서…”

수연은 쑥스러워하며 완성하지 못한 풍경화를 덮고 책장 구석에 재빨리 밀어 넣었던 게 생각났다.

완성하면 남편 재현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그와 함께 다음 해에 여행지로 가자고 했던 곳이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수연 곁에 남은 건 자식들뿐인데 그저 작은 취미를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홀로 남은 수연이 걱정이 된 조문객들은 딱하게 여기며 다들 한 마디씩 되물었다.

"아니...어쩌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

"일하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도 가나봐요."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그쵸?"


남편 재현은 집 근처에 있던 나무들을 가지치기 한다며 오랜만에 사다리를 타다가 그만 낙상하고 말았다.

사람 일은 정말로 모르는 일이라고, 건강하던 사람도 예상치 못하게 허망하게 죽고 만다.

수연은 이 모든 일이 그저 꿈 같았다.

남편의 죽음도 사람들의 뒷 이야기도.


그런데 왜 이토록 슬픈 날에, 수연 앞에 불청객이 나타났을까 생각해 보면 복수심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수연을 힘들게 갉아먹었던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지금 상황에서 반갑지 않았다.

그녀의 편이 되어준 사람이 세상에 떠나자, 홀로 슬픔에 잠겨있는 수연 앞에 낯선 남자가 나타났다.

윤찬이었다.


윤찬은 수연의 첫사랑이다.

그는 수연이 앉은 조문객을 맞이하는 의자 앞에 조심스레 서 있었다.

국화 한 송이를 놓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장례식장 분위기를 낯설게 만들며 수연의 마음을 긁었다.


"갑자기… 여기는 어떻게? 왜 온 거야."

한참 동안 꾹 닫혔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수연의 목소리는 바닥을 긁는 듯 낮고 떨렸지만 벽을 칠 듯한 깊은 울림이었다.

"45년 만인가... 잘 살던 사람이 왜…“

“왜… 왜! 왜! 여기가 어디라고, 내 남편의 장례식장에 나타나."


윤찬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몇 초간 흐른 정적은 주변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 놀란 조문객들은 큰일을 목격한 듯 윤찬과 수연이 다음 대화를 이어가길 지켜보고 있었다.

윤찬은 주변을 의식한 듯 조용히 나직이 말했다.

"민정이... 지금 요양원에 있어. 알츠하이머야. 벌써 몇 해 됐어."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윤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윤찬도, 민정의 남편도 없었다.

그저 오래되고 낡은 감정을 안고 있는 낯선 노인이 힘 없이 서 있었다.


수연은 윤찬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그의 표정을 읽어보려 했다.

주름에 가려졌지만 쳐진 눈가에 숨어 안도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초조함에 가려진 흔들리는 눈동자에 수연의 시선이 머물렀다.

어둡지만 밝은 듯, 낯설지만 익숙한 안도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다 끝난 이야기야. 우리는 그 어떤 관계도 아니야."

수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봤지만 납득을 하지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씩 참아왔던 눈물이 두 눈에 가득 차고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자 얼어붙은 눈이 녹아내리듯 흘렀다.

메마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수연을 보고 윤찬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자 바로 수연은 매몰차게 윤찬의 손을 내치며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우린 너무 몰랐어. 서로에게 제대로 말을 못 했어…“

“아니야, 아니야… 수연아 우리가 좀 더 이야기를 했더라면…”

“무슨, 무슨!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나가줘. “

수연이 울부짖으며 내쫓으려 하자 주변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윤찬은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서려 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수연은 고개를 떨구고 일어서며 다시 말했다.

"가줘. 제발. 여긴 당신이 들어올 자리가 아니야. 내 인생에서... 이미 너무 늦었어."

그가 한 발자국 물러서자 수연은 천천히 윤찬이 내려놓은 국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꽃은 윤찬의 손을 떠났지만, 그의 마음이 아직 그곳에 남은 듯 보였다.

수연은 그 꽃을 집어 들지도, 치우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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