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 작별인사

고백

by 소극적인숙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윤찬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인에 대한 예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랜 시간 눌러왔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입술 끝에는 조용한 말이 맴돌았다.

“잘 가시게.”


윤찬은 다음 행선지를 생각하며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차를 향해 걸었다.

창 밖에서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과 편지를 바라보다 잠시 숨을 고루 내쉬며, 또 하나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요양원에 방문하는 날이다.

윤찬은 요양원에 있는 아내에게 말동무를 해주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내 민정이 머무는 이곳은 손꼽히는 곳으로, 대기를 할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자주 가지 못하는 상황에 마음이 무겁고 신경이 쓰였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요양원의 복도가 서늘하고 조용했다.

윤찬은 천천히 민정의 병실 문을 열었다.

“민정아. 나 왔어.”

창가 근처에 앉아 있던 민정이 돌아보며 텅 빈 눈으로 윤찬을 쳐다봤다.

“또 왔네? 어, 오빠구나.”

민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심 반가운지 손을 몇 초간 흔들었다.

“오늘도 꽃 가져왔어?” 어떤 꽃이야? 장미? 아니면 튤립? “

“오늘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안개꽃이야.”

윤찬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민정은 꽃다발을 받고, 잠시 향을 맡았다.

그녀의 눈망울은 반짝였고 윤찬 앞에서 더없이 해맑은 어린아이 같았다.


“오빠… 나는 안개꽃이 참 좋아. 얘네들은 작고 오밀조밀해."

"멀리서 보면... 흐릿하게 흩어져 있는 이 작은 꽃들이... 가끔은 나처럼 보여."

그녀는 킥킥 거리며 웃었다.

"나도 조금씩 기억이 흐려지는 중이야. 요즘은 너랑 나 둘 다 그런 거 같아."

민정의 웃음에 윤찬은 바로 대답했다.


다시 창밖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민정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 같았다.

"어제는... 엄마가 왔었어. 나 학교 끝나고 집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왜 여기 있어?"

"아! 근데... 오빠는 언제 왔어? 누구야? 오늘? 아니면 어제 왔나?"

윤찬은 민정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얘기했다.

"오늘이야. 지금 막 여기 왔어."

아내의 눈 속에 서글픈 남자의 얼굴이 가득 차 보이자 그 모습이 싫은 듯 윤찬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애써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했다.


"요즘도 조카가 자주 들른다고 하던데. 민정아... 네가 기억 못 해도, 널 사랑하는 사람이 너 하나뿐은 아니야."

그리고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민정은 안개꽃을 계속 바라봤다가 매만졌다가 손가락으로 꽃망울을 튕기며 놀았다.

윤찬은 그녀를 쭉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민정아. 우리, 이제 그만할까?"

민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찬을 바라봤다.

"뭘? 그만해야 해?""

두 사람은 침묵을 가지며 말없이 창 밖을 계속 쳐다봤다.

"이렇게...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속하며 묶고 사는 거."

"......"

"우리의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고,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어."

"......"

"민정아... 나 흔들린다. 이제는 내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 지금 아니면 나에게는 기회가..."

민정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윤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눈동자엔 아무 말이 없었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슬픔을 띈 찡긋한 웃음이 스쳐갔다.

"오빠, 나... 기억 안 나는 날도 많아. 그런데 기억나는 일도 있다?"

"응... 어떤 일?"

윤찬은 그저 고개를 떨구며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민정이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당신, 왜... 울어요?"

정신이 돌아온 민정의 목소리에 윤찬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돌아... 왔어...? 나 누구야."

"여보, 왜 이래요. 여기 눈물이 번졌어요. 휴지 좀 닦아봐요."

"응... 나...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담담하게 윤찬을 보며 기다렸다.

하지만 윤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고백이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생각에 민정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말... 하기 힘들어요? 내가 얘기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민정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버텨준 윤찬이 이제는 자신을 버거워한다는 것을.

남편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던 민정은 윤찬과의 마지막은 인정하기 싫었다.

정신이 잠깐 돌아왔던 어느 날, 그가 함께 머물던 그날 밤에 있던 일이다.

악몽을 꾸던 남편이 울먹이며 부르던 그 이름.

민정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여보, 힘들죠..."

윤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울었던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부어 있었다.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 그런 날이 많은데 오늘은 좀 기억할게요."

민정은 윤찬의 두 손을 모아 잡으며 가볍게 흔들며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윤찬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이 순간만큼은 윤찬의 아내 민정으로, 되돌아온 정신으로 윤찬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민정은 이야기를 해나갔다.

"나 혼자서는 외로웠을 거야. 근데 오빠가 있어서, 당신이 있어서 난 참 다행이었어."

윤찬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오래 울렸다.

"그래서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염치없지만 나 이제 되돌아가고 싶어. 그 시절로 조금 돌아가 보려 해."

"오래... 마음에 품었어? 나랑 살면서..."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음 짓는 민정은 대화를 이어갔다.

"여보... 고개 들어봐. 어쩌면 잠깐 돌아온 정신으로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다시 살 수는 없지만, 남은 인생은 솔직히 살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민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순간 그녀는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찬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말하지 못한 그날들이 있어. 우리에겐 시간이 없잖아."

"알아. 내가 당신 옆을 그렇게 차지하는 게 아니었어. 알면서 모른 척 받아준 거."

민정은 양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야무지게 닫으며 미소를 지었다.

윤찬은 그제야 웃었다. 민정도 웃었다.

"그럼, 우린 이제... "

어렵게 윤찬이 말을 이어 나가는 순간 민정이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졸혼이지 뭐. 결혼 졸업해."

그리고 그것으로,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병실 문을 나서며 윤찬은 창가 쪽에 놓인 꽃을 다시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 꽃은 민정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가져온 꽃처럼 보였다.

흐릿하고 작지만 오래 피어 남는 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윤찬은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정리가 더 필요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민정과 함께 살던 집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의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전하지 못한 편지들과, 언젠가 수연을 떠올리며 적어둔 일기 몇 장도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마지막으로 수연에게 쓰고 마무리한 편지지를 잡는 그의 두 손은 조금 떨렸다. 윤찬은 수연에게 쓴 편지를 다시 천천히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수연아.

이 글을 네가 읽을 날이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이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싶어.'


'45년이 지났다. 참 오래 걸렸어.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네 앞에 서면 그 시절 우리의 즐거웠던 여름이 떠올라. 서로가 처음으로 함께 한 여정에서 사진을 찍으며, 더웠던 그 해를, 함께 보낸 설레었던 그때를.

이 편지를 쓰니 그해 여름의 나로 돌아가는 것만 같더라.'


'한참 지났지만 어쩌면, 나는 이 말을 꼭 너에게 해두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우리가 멀어졌던 이유를 나는 아직도 기억해.

그건 누가 나빴다거나,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으니.

서로의 마음이 깊었기에 더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오히려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린 위축되고 다른 방향을 보게 됐지.'


'그 틈에 누군가는 알아챘고,

그 틈에 누군가는 들어왔어.

나에게는 민정이었고, 너에게는 재현이었겠지.'


'처음엔 다들 운명이라 했어. 하지만 나는 알았어. 그건 선택이자, 조금은 도피였어.'


'이제는 관계를 정리하게 된 민정이와의 시간은... 나쁘지 않았지.

그녀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고, 내가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우린 그 세월을 함께 했어.

그렇게 꽤 오래, 사이좋은 부부처럼 살았지.'


'하지만 너는 몰랐을 거야. 나는 그렇게 모든 부부가 평온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 속에서, 어딘가 네가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늘 돌아보게 되었어. 우리가 놓친 그 순간, 그 가을에, 그 말 한마디 못한 나 자신이. 그리고 너와 손끝에 닿지 못했던 온기를.'


'나는 민정에게 작별을 고했다. 책임을 다했고, 더는 그녀의 삶에 내가 구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했어. 이제야, 이제야 다시 너에게 내 마음을 꺼내봐.'


'네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수없이 말했지. 내 마음속의 천사와 악마가 있는 것처럼 무거운 저울질을 하며 사실은 아니었지.'


'그때도, 지금도, 나는 너를... 다시 생각하게 돼.'


'어떤 결정을 내려도 좋다. 그저, 이 마음을 네가 한 번쯤은 알아줬으면 해.

추잡한 어떤 노인 내의 오래된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린 글이 아닌.

진심을 담은 어떤 노년의 그저, 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그걸로 충분해.'


'안녕.

윤찬이가 수연에게.'


그는 마지막 짐을 다 챙기고 민정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왔다. 윤찬의 한 손에는 마지막으로 쓴, 드라이플라워가 하나 들어 있는 조심스럽게 접힌 편지와 함께.

그는 마지막으로 수연의 우편함 앞에 섰다. 며칠이 흐른 조용한 밤에는 수연 혼자만이 집에 있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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