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온 그날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수연은 재현이 사라진 첫 밤의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식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어느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
수연은 식탁 끝에 앉아 모서리를 손으로 쓸며 닦았다.
마주 보고 식사를 하던 재현과의 일상을, 차 한잔을 곁들이며 편안하게 이야기하던 그 밤을 기억하며 그가 머물었던 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며칠 비운 집 안은 정신없는 흔적이 보였다.
정리하지 못한 쓰레기와 분리수거, 이 모든 것을 수연이 짊어져야 했다.
다정했던 남편, 그 사람이 하겠다고 얘기하면 수연은 늘 같이 나갔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 벌써 생각나고 그리워졌다.
고요함과 적막함은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수연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줬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날이 올 텐데. 그때는 누가 날 그리워해줄까."
잠시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수연은 정신을 돌리고자 밖을 나섰다.
봄이 되면 꽃이 한가득 피어 예뻐했던 이팝나무가 그녀의 눈에 거슬렸다.
높이 자라는 나무가 창문을 가리자 재현이 결단을 내리며 가지치기한다는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수연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우편함에 낯선 봉투가 보였다.
봉투를 꺼내 살펴보니, 주소도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다.
수연은 봉투를 펼치기가 조심스러웠다.
과거 수연이 좋아하던 프리지어 노란 꽃이 잘 말려진 한 송이와 있었다.
그 편지는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편지 봉투와 꽃 한 송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수연은 봉투를 만지작 거렸다.
식탁 위에 올려두며 한쪽 끝 의자에 다시 앉아 그 봉투와 꽃 한 송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수연이 프리지어 꽃을 좋아하는 걸 아는 사람은 윤찬 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불을 끄고 소파로 건너가 앉으며 수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문득 프리지어의 꽃말을 생각했다.
“순진, 청순함, 천진난만함.”
프리지어의 꽃향기를 떠올렸다.
은은한 향기를 내며 이 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할 때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때 많이 활용되는 꽃이다.
자연스럽게 가족이나 친구에게 선물하기 좋은 꽃이다.
우정 그리고 믿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고르기도 한다.
수연은 다시 천천히 식탁 위에 놓인 편지를 응시했다.
아직 봉투 속에 있는 그 편지가 궁금했지만 이미 읽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봄날, 윤찬에게 생일 꽃다발로 받았던 프리지어를 떠올렸다.
"이미 지난 일인데… 벌써 몇십 년이 흐른 세월이야."
수연은 공허한 마음을 대면하며 누군가와 대화하듯 계속 이어갔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걸까. 애들이 얘기했나."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 근처로 걸어오며 수연은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잡았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편지 내용을 쭉 읽어보다가 마지막 글을 곱씹으며 읽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나란히 놓인 작은 책상에 걸터앉아 편지를 다시 꺼내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때, 수연은 마음 한 구석이 고요히 흔들리는 걸 느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기억들이 하나둘씩 생각났다.
열다섯 살, ‘좋아해 ‘와 ‘사랑해 ‘를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을 따라, 우리는 처음으로 ‘사랑해’라고 말했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연의 집 앞에서 서성이며 이야기하고 함께 포옹을 했던 날.
주변 친구들 눈에 띄어 부끄러움을 타며 서로 아무 말도 못 했던 상황, 그 뒤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날.
어설프고 서로가 조심스러웠던 그 시절.
설렘보다는 어떤 끈끈한 우정이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뭔지도 몰랐다.
윤찬과 수연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입맞춤을 시작하며, 가볍지만 마음을 담은 문자로 이모티콘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도 그때의 흔한 십 대만의 연애를 했다.
하지만 우정과 사랑 사이를 혼란스러워하며 이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고, 삼 개월의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열여섯 살이 된 후로 두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며 우정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주치면 기분 나쁜 듯이 지나갔던 사춘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짐은 늘 어색했다.
풋사과처럼 설익은 두 사람은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었고, 각자 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며 중학교를 졸업하며 서로를 잊어갔다.
서로의 세계를 넘보기 어려웠던 날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마음속의 문을 잠근 채 끝내 서로를 잊어버렸다.
스무 살이 된 수연은 싸이월드에서 미니홈피의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비밀 게시판으로 안부 인사를 건넨 ‘윤찬’.
수연은 그 이름을 보고, 윤찬의 미니홈피로 들어갔다.
그의 배경음악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팝송이었지만 꽤 슬픈 멜로디가 흘렀다.
그때부터 수연과 윤찬은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다시 연락을 하였다.
오로지 싸이월드를 통해서만이다. 서로의 미니홈피에 글을 남기고, 짧은 다이어리 글이 올라오면 거기에 댓글을 달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시간이 흘러 윤찬이 군대에 간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 이후로 수연은 한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이십 대가 되고 네이트온이 활성화했던 시절, 친구 목록을 보며 접속 중인 윤찬을 보면 반가운 마음에 수연이 대화를 걸었다. 다른 어떤 날은 윤찬이 먼저 대화를 걸기도 했었다.
둘은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줄다리기를 하듯 적당히 우정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각자 서로에게는 연인이 있었고 둘은 딱 그 선을 지켰다.
사적인 연락을 자주 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끊기지 않는 실‘처럼 뭔가 오래 남아있었다.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은 사이면서 오히려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그런 관계.
수연은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조심스러웠다고 생각했다.
십 대 시절의 아픔을 겪었던 순수한 마음과 열정, 이십 대에는 오히려 서로가 가장 조심스러웠던 시절.
그렇지만 꽤 따뜻했다고 생각했다.
윤찬과 수연은 서로의 관심사가 겹치며 꽤 비슷함을 느꼈다.
청취했던 라디오 방송이 겹치자 대화의 주제거리가 생겼다.
그와 나누는 취향이 꽤 재미있고 즐거웠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유일하게 수연과 문화코드가 잘 맞는 이성은 윤찬뿐이었다.
수연은 오랜만에 주파수를 맞추며 라디오를 틀었다.
재즈풍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소리의 멜로디가 편하지 않았다.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고 드라이플라워의 꽃잎을 바라보았다.
작은 책상 서랍을 열고 윤찬이 보내온 편지를 깊숙이 안에 넣었다.
“그 시절엔… 나도 너를 참 좋아했던 거 같다.”
흐릿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떨리는 수연의 눈 속에서 옅은 빛이 살며시 보였다.
잘 준비를 하는데 장례식장에서 봤던 윤찬이 생각났다.
그의 떨렸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생각지도 못했던 옛 감정이 몰려왔다.
수연은 심장이 조금씩 고동치는 거 같았다.
자는 동안은 그 감정을 애써 외면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