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
*추천 배경음악 <영화 아멜리에 OST 'Le Moulin'> 들으시면서 읽어보시는걸 추천드려요.
수연은 밤새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몸은 피곤하지만, 왠지 모르게 정신은 맑았다. 그녀는 눈을 꿈벅거리며 편지가 들어있는 서랍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편지의 내용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읽었지만...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싱숭생숭한 마음과는 달리, 드라이플라워는 답을 기다리듯 그대로였다.
수연은 둘째를 출산하고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두 아이를 육아하며 보내는 시간들은 마치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이 잠식했고, 걷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들쑥날쑥했다. 게다가 세 식구에서 네 식구로 늘어난 가정생활은 점차 버거워 보였다. 가사와 육아를 동시에 하며 잠을 줄여야 하니, 첫째 아이의 공부와 놀이를 봐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연히 갓 태어난 아기와 꽤 성장해서 유치원생이 된 아이의 생체 리듬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첫째에게 잠시 알아서 놀라며 말해보지만, 몸은 둘째에게 간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정신은 첫째에게, 둘째를 잊은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 한 달...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잘 지내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연은 전화 한 통을 시작으로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갑자기 울컥함이 올라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수연의 엄마였다.
차분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윤찬이... 결혼했다더라. 그런데... 아내가 너랑 똑같이 무용 전공했던 사람이래."
놀란 수연은
"어... 누구래? 누구랑 결혼했어요?" 되물었다.
갑자기 작은 불티가 수연의 마음속에 톡 떨어졌다. 그리고 그 불티는 점차 커졌다. 분노와 함께 뒤섞여, 뜨거운 바람이 소용돌이쳤고, 마음속은 거대한 화염으로 변하였다. 우울, 슬픔, 한탄, 연민, 증오 등 다양한 감정으로 뒤섞이며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불꽃은, 뜨거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형태가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타오르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오와 분노였다.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려 말을 꺼내는 수연의 엄마는 나머지 대화를 이어서 나갔다.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수연의 시간만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되돌아 온듯
"엄마...그 소식을 누구한테 들은거에요... 결혼은 그래... 뭐 알겠는데요. 그런데 아내가 어떤 사람인데요?"
수연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뭐 래더라... 같은 동창이라고, 동문이라고 그러던데?" 되물었다.
마치 수연이 알거 같다라는 의미심장한 물음으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갑자기 수연은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설마 하며 그녀의 직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제 돌을 앞둔 딸아이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정작 수연의 얼굴은 일그러지며 몸은 그대로 굳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대답이 없는 수연이 답답했는지 엄마는 다시 재차
"얘...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되물었다.
빨리 이 대화를 끊고 싶었던 수연은
"어... 엄마... 알았어요. 이만 끊을게요."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떨린 손을 잡고 휴대폰을 다시 키며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동창이라고? 대학교 동문인가? 누구지?'
그녀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SNS를 찾아봤다. 윤찬과 헤어지고 약 삼 년 후에, 그가 결혼을 한 거다. 뭔지 모를 마음의 무너짐을 느끼며 수연은 분함을 참지 못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그 삼 년의 시간을 기다리고 참았어야 했을까? 수연과 윤찬 사이의 그 시간은, 정말로 그냥, 아름답게 흘러가는 추억으로 남겨야 했던 걸까.
약 8년을 친구에서, 점차 연인 관계로 깊어지면서 둘 사이도 자연스럽게 어느 연인처럼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연과 윤찬은 먼 훗날 미래를 기대하며 자녀 계획도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수연과 윤찬은 헤어졌고, 두 사람에게는 각자 다른 배우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그들의 청춘과 꿈은, 서로 다른 자리를 탐내던 누군가에게 뺏긴 듯, 그렇게 무기력하게 타인에 의해 조정된 것처럼 흘러갔다.
2019년 겨울,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할 때, 전 세계 경제는 어려워졌고 수연의 회사도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녀는 봄에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있었지만 여름, 가을, 겨울이 되도록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고 위기였다. 매달 빠듯한 월급으로 부모님 병원비와 생활비를 돕는 것도 언제까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이 상황과 모든 것이 수연을 서서히 압박해 왔다. 함께 찬란한 미래를 꿈꿨던 윤찬은 변함없이 학업을 이어나갔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냈던 그들은 서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 수 있었다.
'우린 왜... 결국 이렇게 되었을까...' 수연은 휴대폰을 내려놓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결과인데...' 라며 자책을 한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걸 잊은 듯했다.
윤찬과의 이별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과 현실적 차이에서 멀어지며 자주 부딪히던 반복이, 결국 끝을 맺게 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열망이 강했고, 연구를 하며 고민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윤찬은 "나는... 연구 마무리하면 몇 년은 더 걸릴 거야."
늘 수연에게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연에게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라는걸 알고 있어야 한다는 통보였다.
반면 수연은 경제적 안정과 결혼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우린... 그럼 결혼은 언제쯤?"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할 때마다 윤찬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미소만 보일뿐, 수연은 윤찬의 미소 속의 망설임을 알아갔다.
서로의 간극은 점차 벌어지고,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서로의 관계를 이어갔다. 수연은 친구들과 가족들의 기대 속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점차 흐릿해져 갔다. 그렇게 남들의 기대 속에서 바라는 그런 삶을,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설득되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결혼은 그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결혼 시기를 늦추겠다며 선전포고를 하는 수연에게 "정신 차려라. 도대체 언제 결혼하냐... 너만 남았다. 언제 결혼하려고." 라며 못마땅해하는 가족들과 갈등은 점차 깊어졌다.
이상주의자였던 이 둘은, 점차 서로가 달라짐을 느꼈다.
어느 날 윤찬은 수연에게
"우리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약속이 필요해." 라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수연은 궁금해하며
"그게 어떤 약속인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윤찬은 조금 망설이다가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그 끝에 내뱉은 말은
"우선 우리 집은 이혼 가정은 안돼. 그게 첫 번째야. 물론 너는 해당이 안 되지만..."
수연은 어이가 없는 듯 다시 한번 더 물어보며
"그리고? 그다음은?"
"두 번째로는 우리 아버지와 함께 운동을 하면 좋고, 자주 밥도 먹고 안부도 물으며 지내면 좋을 거 같아."
그 말 끝에 수연은
"또... 혹시 있어?" 인상을 찌푸리며 이 약속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윤찬은 확고한 의지를 가진 듯
"세 번째로는 우리 엄마와 성당을 매주 일요일마다 갔으면 해. 내가 못 나가니깐... 그래서 너라도 엄마와 함께 둘이 나란히 성당을 다니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을 거 같아."
수연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 종교 불교인 거 잘 알면서... 그게 가능한 일이야?" 되물었다.
윤찬은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며, 수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가지의 약속과 더불어 앞으로 그와 그녀가 꿈꿀 미래에는 경제적 지원도 양가 집안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사랑만으로 함께 해왔던 윤찬과의 여정이, 이젠 그녀에게 이 사랑은 과연 진정한 것인가 라며, 그들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약속과 조건을 안고 서로가 만남을 가질수록, 의무감, 불안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하나씩, 조용히 멀어졌다.
서로가 멀어진 틈 사이로 윤찬에게는 민정이, 수연에게는 재현이 다가왔다.
낯선 듯 반가운 그녀와 그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위로가 되었던 그 시기를, 이들은 서로가 엇갈림 속에서 서로를 품어주었다. 그렇게 수연은 윤찬을 빠르게 잊고 싶었다.
깊었던 사랑의 맛은 쓰고 가혹했고,
폭풍처럼 다가온 우정이 재빠르게 사랑으로 변하는 과정은 달콤했다.
수연은 재현을 만난 뒤로 얼마 안 되어 결혼을 하였고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재현과의 결혼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둘째를 출산하고 난 그녀는 점차 고독 속에 빠져들었다. 북극에 얼마 남지 않은 빙하에서, 고독하게 헤엄치는 백곰처럼, 자기 자신을 가두고 더 깊숙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언제부터 나를 잃어간 걸까. 엄마인 나, 그리고 아내인 나 말고...'
'그냥 수연, 내 이름 세 글자. 한수연은 어디에 있었던 거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수연은 결국 죽음까지 떠올렸다. 만약에 죽게 된다면, 오히려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어둠은 그녀를 서서히 잠식해 갔다. 마치 악마가 그녀에게 속삭이는 거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결혼생활도, 육아도 모든 것에서 근심, 걱정도 덜어내고 떨쳐낼 수 있을 텐데?'
마음속에서 응어리진 실타래는 점점 꼬여만 갔고 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댁과 갈등의 골도 깊어질 때로 깊어졌다. 신이 있다면 사후세계가 오히려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며 그녀는 한순간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한 적도 있었다.
혼자서 죽는 상상을 하며, 거실의 창문을 열며 난간 위에 올라타 시원한 바람과 공기를 느끼며 걱정할 거리가 없는, 죽음의 안락한 삶을 택하고 싶었다.
아슬하게 매달린 그녀를 붙들고 끌어내린 재현은,
"제발... 제발...! 진정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제발..." 애원하며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은 멈출 줄 모르고, 한 번씩 그렇게 그녀를 붙잡았다.
수연은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사랑스러운 아이마저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이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극 속에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윤찬의 뜻밖의 결혼 소식이 왜 이리 억울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사랑만으로 안 되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웠던 과거의 시절과 그 감정은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아픔이었을까. 어쩌면 수연은 먼 훗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녀가 그렸던 미래가 배신당한 현실이라면, 이제는 그 꿈을 놔줘야 할 때다. 부모로서, 아내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수연에게는, 끝까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