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돈키호테
<추천 배경음악: 쇼팽, 빗방울 전주곡 Chopin: 24 Prelude Op. 28: No. 15 In D-Flat Major "Raindrop ">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수연에게는 잊히지 않는 계절이 있다.
드넓은 순천만 갈대밭에서 휘날리는 갈대 사이를 지나 나란히 걸었던 시간들, 그 뒤로 겨울이 오고 다시 그녀에게 가을이 왔다. 다섯 번째 계절을 다시 보는 듯 바람과 함께 그녀의 시간도 휘날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윤찬의 편지를 읽고 잠시 일렁거리는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계절이 마치 다시 태어난 듯,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가을과 겨울 사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계절의 경계가 없는 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수연은 며칠 동안은 악몽을 꾸기도 하고, 잠을 설치기도 했다.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고 착각을 할 정도로 현실을 조금씩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겨우 보냈다.
깊은 잠에 든 수연은 한 꿈을 꾸었다. 붉은색의 화려한 발레 튜튜를 입은 키트리의 모습을 한 그녀, 돈키호테의 마음을 가진 키트리로 분장한 수연이었다. 과거 수연은 이십 대 중반까지 무용을 했지만, 정처 없이 떠돌며 그녀의 또 다른 꿈을 찾아 떠났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하며 색다른 도전을 해보고, 성취를 경험한 이후로는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수연은 또 다른 자아를 찾기 위해 꿈꿨던 것들을 버리고, 마치 돈키호테처럼 산초도 없이 홀로 떠났던 날도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수연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가쁜 숨을 연신 몰아 내쉬었다. 심박수는 올라갔고 호흡하기가 점차 힘겨웠다.
"폐 속까지 숨이 점점 조여와..." 수연의 머리는 땀으로 젖었고, 귀에서는 삐이 하는 이명 소리가 들리며 진동을 느꼈다.
'괜찮다... 괜찮아...' 그녀 스스로 속삭이듯 되뇌며 입으로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안정제... 안정제를 먹어야 해..." 침대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찬장에 넣어둔 약을 한 알 복용한다.
"괜찮아... 괜찮다. 숨을 후우 후우 내쉬면..." 마치 남편 재현이 있는 것처럼 옆에서 다정하게 말을 거는 듯했다. 함께 하자며, 우리 같이 할 수 있다며.
"좀 나아질 거야..." 누군가와 대화한 듯 수연은 한결 호흡이 부드러워졌다.
수연은 가장 열정적으로 뜨겁게 일했던, 20대 마지막 시절부터 30대 초의 시절을 서서히 기억해 냈다.
그때만큼 일을 할 수 있을까. 수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 흔든다. 몸과 마음 정신까지 다 늙어가는 상황에서 이제는 세상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 추억을 떠올리는 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는 자기 위로 같은 시간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한 줄로 왼쪽부터 차례대로 본인 소개부터 할게요."최종 면접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쓴 수연은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당차고 반짝거렸으며 입가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최종 면접 후보생 중에 나이는 가장 많았지만, 열정과 마음은 신입과 다름없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점점 입이 바싹 마르고 몸이 굳어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수연은 남들과는 색다른 대답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후보생들의 유창한 대답을 듣고 주눅이 든 그녀는 모범 답안을 내놓듯, 계획과는 다르게 비슷한 답변을 하였다.
면접관은 마지막으로 최종 질문을 하였다.
"만약 본인이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왼쪽부터 차례대로 최종 후보생들이 답변을 하였다. 대부분 본인의 전공을 살리고, 그동안의 실무 경력과 공모전 등의 결과를 토대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겠다는 이야기였다. 수연은 최종 면접을 본 회사와 다소 동떨어지는 전공을 이수했지만, 그녀의 실무 경력과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며 마지막으로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저... 저는요! 회식 때 노래를 정말 잘할 수 있습니다!"
면접장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이를 놓치지 않고 수연은 용기를 내어 대답을 하였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이 바로... 2NE1의 fire입니다!"
순간 어디서 킥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래 제목처럼! 저의 열정을 담아, 탬버린도 가장 신나게 칠 수 있고... 일도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면접관에서 나는 웃음소리였다. 그들의 표정은 이런 대답은 처음이라는 듯,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입가는 씨익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최종 면접을 한 방에 날리며 망쳤다고 생각했다. 실력 있고 쟁쟁한 후보생들 사이에서 한 명을 뽑는 자리라 가능성이 없을 거라 여겼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돈키호테처럼, 그렇게 면접실을 나오고 수연은 준비해 온 운동화로 신발을 갈아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최종 합격 되었다는 결과를 문자로 받아보고 가족들과 기뻐하며 환호를 질렀던 그날이, 수연에게는 생생하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며칠이 지나고 수연은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다. 윤찬과의 재회 이후 그의 편지를 읽은 뒤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예전처럼 조금씩 생기를 보였다.
하루는 꿈속에서 부채를 들고 다시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는데, 젊고 아름다웠으며 빛이 났다. 키트리 역할을 한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발레리나의 모습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보였다. 수연은 빨간 장미로 활짝 핀 듯, 해방된 모습이었다. 무용의 꿈을 키웠던 그녀가 꿈을 접으려고 할 때 가능성이 있다고 지지해 주셨던 스승님이 떠올랐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춤을, 무용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응원을 해준 분이었다. 돈키호테처럼 자유롭게 떠나고 때로는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했던 그녀에게 그 꿈은 아련하고 슬펐다. 날기만 할 것 같던 새가 갑자기 추락한 것처럼,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벼랑 끝이었다.
잠시 숨을 다시 헐떡이는 수연은 천천히 호흡을 내쉬었다.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남편이 알려주던 복식호흡을 기억하며 따스했던 재현의 목소리가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홀로 외로움을 감당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여러 번 읽었던 편지를 접고, 다시 봉투에 넣었을 때 수연은 그저... 천천히 젊은 시절을 생각하며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었다.
창 밖으로 비추는 초록빛깔의 반짝이는 나무들, 그리고 파릇한 뒷 산을 멍하니 보았다.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만났던 그때 그 시절...
윤찬과 수연이 서서히 점차 커져가는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그때는... 참으로 순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욕심이 난 듯, 그 순수함은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는 고독하고 외로운 노인이 되었다.
'지금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정신 나간 노인이 무슨 별 사랑타령을 한다고 할 거야.'
'추잡하다고 하겠지. 우리 자식들은, 손주들은, 며느리 얼굴을 볼 수 없겠지.'
수연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한 편으로는 윤찬의 생각이 궁금했다.
이제 와서 다시 찾아와서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여보, 우리의 가을은... 겨울은 어디 갔을까요." 수연은 나지막이 말을 했다.
"오늘따라 당신이 정말로... 무척 보고 싶소."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나 혼자 놔두고 떠날 수 있습니까. 신이시여... 저를 차라리 거두어주소서."
수연은 신세 한탄을 하듯 혼자 남겨진 자신을 자책하며 윤찬과 재현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렸다. 선택의 기로에 남겨진 그녀에게 조금은 일렁거리는 용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재현을 따라갈 것인지, 윤찬을 따라갈 것인지. 수연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