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봉투

불청객이 된 이름

by 소극적인숙


눈을 떠보니 부엌 창을 넘어 햇빛이 꽤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도 말라가던 새싹이 조금 더 힘 있게 자랐다. 재현의 장례 이후 수연은 며칠을 누워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물 한 모금에 약을 먹고, 다시 눕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수연은 잠자리를 뒤척이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낮잠을 자고 눈을 떠보면 대부분 점심이었다. 그리고 늘 안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주변의 적막이 그녀를 가두는 게 싫었는지, 약간의 소음이 그녀의 하루, 하루를 살게 만들었다.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오랜만에 허리를 조금 펴본다. 세월이 흘러 조금은 수그러진 허리, 둥글게 말린 어깨는 그녀를 더 작게 보였다. 거울을 보며 얼굴의 주름을 살며시 만져보다가 둥근 허리가 신경 쓰였는지 조금 더 올곧게 펴보려 애썼다. 천천히 한 걸음씩 주방을 향해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유리잔에 꽂아둔 드라이플라워 한 송이를 바라보며, 윤찬을 떠올린다. 수연의 마음은 그대로일까, 아니면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랐지만 그 형태는 남아있는 걸까.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현관 초인종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예전보다 걸음이 느려져 천천히 걷는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휴대전화 벨부터 울린다.


"응~그래. 왔니."


"어머님~ 혹시 외출하셨을까 싶어서 전화를 드려봤는데 집에 계시죠? 반찬 좀 가져왔어요." 며느리였다.


수연은 반가움보다는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잠시 그녀의 상상이 깨지고, 현실로 돌아온 일상이 다시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며느리의 얼굴을 보니 수연은 가족들이 생각났다. 일렁거리던 마음을 꾸욱 눌렀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매번 말해도, 며느리는 늘 "어머니도 저와 같은 여자예요. 외로움 느끼면 안 되세요." 이렇게 같은 말을 했다.


가끔은 불쑥 찾아올 때면 놀라기도 했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며느리가 손을 내밀었다.

흰 봉투를 들며

"그런데... 어머니 이거... 제가 보려던 건 아닌데요."

"우편함에 여러 가지가 꽂혀 있길래 분류하다가... 저도 모르게 겉 봉투만 보고 가져왔어요."

낯익은 필체와 그의 반듯한 이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윤찬.


이름을 보는데 갑자기 수연은 손 끝이 떨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며느리 연주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궁금한 눈빛을 띄며 연주는 다시 한번 수연을 불렀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안색이 갑자기 안 좋으세요..."


"어... 그, 그냥... 그... 저... 옛날 친구."

수연은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며느리의 눈치를 보았다.

연주는 잠시 수연의 얼굴을 살피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 어머니 저 반찬 가져온 거 냉장고에 넣을게요. 혹시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그 사이에 수연은 봉투 안에 들어있는 편지를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며느리 연주는 어머님 수연이 편지를 읽는지 확인한 후, 힐끗거리며 이야기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수연이 다 읽을걸 확인하고 연주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이리 휙 저리 휙, 대화를 재차 빨리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하였다. 마치 수연의 혼을 쏙 빼놓는 듯,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몸은 좀 어떤지, 식사는 어떻고, 수면은 어떤지 등 그리고 병원 예약부터 갑자기 고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질문은 요즘 어떤 친구분이랑 연락하는지였다.

마치 딸과 엄마가 안부를 주고받는 듯 편안한 대화처럼 보였지만, 시어머니의 수상한 근황을 살피는 눈치 빠른 며느리의 면담이었다.



그날 밤 연주는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혹시 어머님이 만나시는 친구분들 중에 '윤찬'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

잠시 미간을 찌푸린 수연의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 글쎄...?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같기 도는 뭐야.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몰라... 왜?" 귀찮아하는 내색을 띄며 고개를 돌린다.


"어머님이 남자친구 생기셨나 봐."

수연의 아들은 눈썹이 산처럼 라갔다가 눈이 점점 커지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 왜 이리 놀래, 생기시면 좋은 거지!"


"무슨... 아버지 장례 치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돼? 그럼 어머님 저렇게 외롭게 독수공방 하며 지내시라고?"


"갑자기 엄마가 왜 남자친구가 생겨. 그냥 그 나이대 되니 소식 안부 묻는 거지. 뭘 그리 진지해."


"참나, 여보 연애하는데 요즘 세상에 나이 타령이야!"


"이 사람이! 그럼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노인네랑 연애하라고 놔두는 게 자식 된 도리야?"


"왜 나한테 화를 내! 나는 걱정되어서 그런 건데... 어머님 누가 돌봐드려? 자기가 잘 챙기기라도 해? 그렇다고 내가 찾아뵙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럼 여태 우리 엄마 그렇게 전화드리고 반찬 가져다 드리는 게 귀찮았어? 얘기하지 그랬어? 어?"


"아니 왜 말이 또 그렇게 돌아가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데... 난 그래서..."


"그래서? 잘 이루어지면 모르겠지만 안되면... 우리 엄마 상처받고 힘들어지면 그 나이에... 약까지 드시는데..."


"자기는 알아? 자식들이 있어도 다 각자 독립하는 거고, 결국은 혼자야, 혼자. 그런데 어머님이 워낙 아버님과 사이가 좋으셨잖아. 충격이 크실 텐데... 난 그게 걱정이 되어서 그래."


"아무리 가족이 옆에 있어도 마음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어머님은 지금 너무 혼자만 지내시려 하잖아."

수연의 아들과 며느리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중재가 필요한데 이 두 사람만의 대화로는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수연의 아들은 조금 지친 듯

"모르겠어. 그만 얘기해. 우리가 지금 거기까지 생각하긴 너무 먼 미래다."


"이게 왜 먼 미래야? 여보, 당신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


"자기는 남이라 그래, 며느리잖아. 가족이라면 그렇게 얘기 못하겠지..."


수연의 며느리 연주는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섭섭한 표정을 보이며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그래, 좋아 남이야. 그런데 나도 같은 여자로서 얘기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왜 말을 못 해? 내가 그렇게 잘못생각한 거야? 나도 대변해 줄 수 있잖아."


"그 대변이라는 게... 참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연애는 무슨..."

아들은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에 질까 봐 연주가 더 몰아붙이며

"여! 보! 말이 좀 심한데?"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지금 연애고 사랑타령이고 할 나이도 지났고, 그럴 상황도 아니야. 현실적으로 좀 보라고!"

결국 아들이 폭발하며 터졌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는데 엄마까지 저러니 속이 오죽 답답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갑자기 엄마가 연애라니...

결국 수연의 아들과 며느리는 계속 다투다가 그렇게 밤을 보냈다.

이렇다 할 해결책도, 더 나은 방법도 없었다. 그저 자식 된 도리로서 걱정이 된 가족들의 실랑이였다.



수연은 며느리가 다녀간 이후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편지가 또 왔지만 읽어볼 자신이 없었다.

윤찬은 수연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답장이 없어도 계속 보낼 거 같았다.

왠지 모르게 수연은 그렇게 직감을 했다. 어쩌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르는 상황일 테니깐.


갑자기 사랑이라고 하니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까, 그녀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남편 재현과 그리고 남은 가족들 그리고 본인을.

수연은 자신을 찾고 싶었다. 그렇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그를 따르던 산초와 그리고 아름다운 키트리를... 잊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열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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