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답장
계절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봄인지 여름인지 모를 날씨 속에서 윤찬은 늘 가벼운 외투를 의자에 걸쳐두곤 했다. 어느 날은 햇살이 따사롭다가도, 또 다른 날은 더위를 이기지 못해 온몸까지 붉게 닳아 오르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시원한 바람이 불면 온몸이 서늘해지며 차가운 기온에 예민해지기도 했다.
창 밖을 넘어 초록잎이 가득한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짙은 잎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 시선이 머물렀다. 윤찬은
잠시 눈을 감았다. 수연과 나란히 숲길을 걸으며 산책하는 풍경을 떠올렸다. 한 걸음 좀 더 앞서 걸어가면 그 뒤로 수연이 조금씩 따라오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렸다.
"저... 교수님. 교수님?"
김조교의 목소리에 윤찬은 화들짝 놀랐다.
"어... 언제 왔나?"
윤찬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땀이 묻어 나왔다.
에어컨과 선풍기 바람에 오래 노출되어 으슬으슬 추웠다. 낡은 의자에 얇은 담요를 두르고 웅크린 채로 잠들었던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고독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서류와 우편물을 분류하며 전달드릴 게 있어서 잠시 들렸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하신 거 같습니다..."
김 조교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윤찬을 힐끗 봤다.
"아, 잠깐 잠이 들었네. 크게 신경 쓸 거 없어."
김조교는 가져온 우편물을 책상에 내려놓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윤찬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우편물을 살폈다.
하얀 종이들 사이로 진한 노란색의 낯선 봉투가 보였다.
그는 다급한 손으로 봉투를 휘익 낚아챘다.
<더워지기 전에, 당신에게 보냅니다.>
"보내는 이: 이수연"
"받는 이: 박윤찬"
선명하면서도 간결한 손글씨가 눌러 적혀 있었다. 윤찬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수연의 편지를 받고 여러 번 안경을 벗었다가 꼈다가 눈을 비볐다. 노란색 편지봉투를 들자 울컥한 감정이 몰려왔다. 차마 봉투를 뜯지 못하는 그는 떨리는 손을 붙잡고 있었다. 윤찬의 이마에는 더 깊은 주름이 새겨지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온 편지다. 아, 얼마나 기다렸는가.'
그러나 윤찬은 뜯는 순간, 이제 이상과 현실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걸 알았다.
한숨을 고루 내쉬었다. 윤찬은 봉투를 집어 눈을 감고
코 끝에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 수연의 향기가 느껴졌다.
몇 달을 기다렸던 그는 설렘과 불안함이 동시에 다가왔다. 수연에게 온 편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감으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봉투를 뜯었다.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진 코스모스 꽃밭, 나무 풍경이 그려진 엽서가 있었다. 뒷장을 돌려보니 오른쪽 하단에는 짤막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수연의 익숙한 듯 낯선 필체가 적힌 편지 한 장이 더 들어있었다.
윤찬에게,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오랜만이었어요.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고민을 해봅니다.
왜 이리도 어색하고 낯설까요. 우리는 가까웠던 사이로 지냈던 때가 있었는데...
그 뒤로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죠. 우리도 강산처럼 이렇게 주변아 바뀐 걸 아시나요...
당신이 보낸 편지들을,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어떤 날은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그대의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보느라... 사실 믿기지 않았어요.
우리의 십 대는 사과처럼 풋풋했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을 보내고, 서른 즈음의 서로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두 사람도, 수많은 사람들 중의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하게 되더군요.
각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저와는 달리, 당신은 그저 묵묵히 당신의 길로 가려했죠.
이상을 찾는 길 또는 현실을 마주 하려 하는 길이라 하더라도,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갈라졌죠.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니, 장애물이라 생각했던 건 그저 그림자뿐 인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나이 들어서 깨닫게 되었네요.
윤찬... 당신을 밀어내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저에게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글로 편지를 쓰는 제 마음이 어색해서 인지... 호칭 하나도 이렇게 놓지 못하는 이 상황.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혹시, 기다려 줄 수 있나요.
우리는 다시 천천히 서로를 알아갔으면 합니다.
놓쳤던 그 시간 속에서 당신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리고 이 생의 마무리에 있어서...
그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떤 건지 알고 싶습니다.
이제는 저도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수연
윤찬은 편지를 들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벅차면서도 아렸다. 기쁘면서도 슬픈, 그리고 죄책감이 한 번에 몰려왔다.
어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엇갈림이었을 뿐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날들이 지속되는 상황을 마주치던 그저 젊은 청춘이었다.
몇 십 년을 지나 돌고 돌아,
이제야 윤찬과 수연은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이 편지는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치 서약서처럼 하나의 증표가 되었다.
코스모스 꽃이 가득한 작은 엽서, 이 그림 한 장에 윤찬은 손가락으로 훑으며 풍경길을 따라갔다.
마치 그 길은 수연과 윤찬이 걷는 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