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인연
녹음이 짙어진 계절이 왔다. 여름은 그 긴 세월을 지나 여전히 더위를 품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빛을 받은 나무들은 저마다 푸릇한 색을 띠며 사람들의 발길을 맞이했다.
윤찬은 더위를 잠시 식힐 겸 수연이 보낸 편지를 한 손에 쥐며 외출을 했다. 집 근처에 위치한 공원에서 산책을 할 계획이었다. 다들 무더운 여름을 견디기 위해 그늘진 나무 주변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지 각색의 돗자리들과 텐트는 알록달록 했고 공원은 활기가 돌았다.
혼자가 된 윤찬은 공원길을 걸으며 약간의 고독함을 느꼈다. 민정과 포장한 커피를 들며 산책했던 길, 그리고 함께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벤치 앞에 서성이며 그녀를 조금 그리워했다.
'다 지난 일인데... 민정과 나는 이제 끝난 사이야.'
후련했던 마음이 다시 무거워지며,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윤찬은 무거운 마음을 접기 위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공원의 다른 둘레길을 찾아보며, 나무가 빼곡하게 있는 곳을 지나 마침내 넓은 공터로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는 새하얀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며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단체 무리 중에서도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한 남학생이 보였다. 궁금한 나머지 윤찬은 학생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슬며시 물어보았다.
"얘야... 너는 무엇을 그리고 있었니?"
낯선 노인의 질문에 당황한 학생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해나갔다.
"저... 저는 아직 다 그린게 아니라서요...
대답을 들은 윤찬은 그림을 다시 보았다.
형태의 틀을 갖춰간 그림처럼 보였는데 완성된 게 아니라니 궁금해졌다.
"내가 보기에는 공원 주변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 같은데... 왜 다 안 그렸다고 생각을 했니?"
윤찬의 물음에 학생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답을 하였다.
"사실 여기 공원은 몇 번 와봤지만... 늘 푸른 풍경은 아니었거든요. 비바람이 불거나 장마가 오는 날에는 주변의 흙들이 질척해져요."
그리고 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며 그다음 말을 이어서 나갔다.
"나뭇잎과 가지들이 떨어지면요. 길 주변이 지저분한 듯 보이지만... 위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반대로 바닥에서도 볼 수 있어요."
그 말 끝에 윤찬은 학생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며 사로 대화를 이어서 나갔다.
"그렇다면 공원길 주변에 떨어진 잎들과 나뭇가지를 더 그려 넣으면 완성되는 거니?"
"예... 그렇게 그려도 되지만... 비가 내린 뒤에 해가 비추면 무지개도 가끔 보이니... 고민이 되네요. 이것저것 그려 보자니 또 어색한 느낌도 들고요."
윤찬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고 보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대부분 비슷해 보였다.
윤찬은 다시 한번 학생이 그린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며, 수연에게 받은 편지를 꺼내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나는 오늘 여기서 편지를 읽을 생각이었단다. 마침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더구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너의 그림 속에 내 모습을 그려보는 건 어떠니. 내가 앉으려던 벤치가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거든."
가만히 듣던 남학생은 긍정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윤찬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기 벤치에 앉아서... 이 여름의 문턱을 함께 추억하고 싶은데..."
학생은 씩 웃으며
"네! 그렇게 해봐요. 저도 한 그림 하거든요! 제가 멋지게 그려 넣을게요."
"그거 참 좋구나. 그럼 멋지게 부탁할게. 미래의 화가님!"
학생은 그 말 끝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벤치에 앉아있는 윤찬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윤찬이 자리 잡은 위치는 꽤나 북적였는데, 아빠 엄마의 손을 꽈악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부터 다정한 연인의 모습까지 다양했다.
학생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색채를 넣어 활기를 불어넣었다.
잠시 후 윤찬을 부르며 완성된 그림을 보여줬다.
"할아버지... 어때요? 여기서 더는... 아휴 못 그리겠어요."
그림을 본 윤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연의 편지를 읽는 동안 윤찬은 생기가 돌며 웃고 있었다.
"정말... 멋지구나...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학생은 어깨를 으쓱대며 양손을 한껏 올렸다.
"할아버지가 편지를 읽으시는데 표정이 참 좋았어요. 덕분에 제 그림도 조금 특별해진 듯? 지루했던 사생 대회도 버틸만했고요."
윤찬은 고마움을 표현하며 학생에게 그림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봤다. 남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에 찬 얼굴을 내비치었다.
'만약... 나도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컸을 텐데...'
한때 윤찬도 민정과 자녀 계획을 세웠었지만, 노력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찬은 그림을 그려준 학생을 바라보며 아빠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떠올려보았다.
고마운 마음에 성의 표시를 하고 싶었지만, 학생은 재차 거절했다.
"덕분에 제 사생대회도 잘 마무리했는데요 뭘..."
"아! 할아버지! 혹시 SNS 하세요? 제가 SNS 활동하며 그린 그림도 올리고 있거든요. 하실 줄은... 아세요?"
학생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지그시 윤찬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윤찬은 그런 시선이 느껴졌는지 휴대폰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그럼, 당연히 알지... 그 인스타그램 같은 거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제 계정 알려드릴게요. 팔로잉하시고 궁금한 거 있으면 DM으로 물어보세요. 좋아요, 눌러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학생은 깔깔대며 웃었다. 성숙한 어른들만의 대화를 한 듯 유익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 이거 말이니? 여기 접속해 보니 제법 훌륭하구나."
학생은 그 말에 쑥스러운 듯 얼굴이 붉어지며 머리를 다시 긁적였다. 그리고 이 둘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윤찬은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다시 봤다. 부드러운 터치로 인자하게 그려진 한 노인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수연의 편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해 보였다.
"내가... 이런 표정을 보이다니... 알다가도 모르겠군."
"수연이가... 나를 바꿨네... 내가 이럴 줄이야."
윤찬은 고개를 들어 나무들을 바라보며 수연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