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은 며칠째 병실에 누워 있었다.
윤찬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부디 접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수연아, 그래도 아직은 손이 참 따뜻하네. 무슨 잠을 그리 깊게 자니."
그는 밤낮을 세며 그녀 곁을 지켰다. 그리고 자장가를 불러줬다.
어린 시절 들었던 음정, 가사를 떠올리며 매일 멜로디를 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연의 의식이 약하게 돌아오는 게 보였다.
눈을 깜빡이며 흐린 눈으로 깊은 잠에서 빠져나온 수연.
그 모습을 보자 윤찬은 눈물을 보였다.
"정신이 좀 드니,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겠어?"
수연은 윤찬의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더 이상 어디 떠나가면 안 돼. 우리 어렵게 만났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너의 손을 잡았는지 모르겠어."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손을 계속 잡고 있던 윤찬의 우직한 손이 보였다.
그녀의 호흡은 고요했고, 의식은 돌아왔다.
윤찬은 서둘러 병동과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가족들한테도 연락했으니깐 다시 면회 올 거야."
다급해진 윤찬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쁜 손주들 보고 싶지. 못난 내가 앞에 있어서 미안하다..."
희미한 미소를 지며 수연은 윤찬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를 올려봤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햇살은 눈부시고 밝았다.
꿈속에서 보던 황금빛과 똑같았다.
따뜻한 공기와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황금빛 들판에 한가운데 서 있던 수연.
(현재의 수연) "여기는 어디일까."
저 멀리서 젊은 여자가 자신에게 천천히 걸어오는 걸 느꼈다.
하얀 옷을 입은, 검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젊은 날의 수연이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와 반짝이는 눈빛을 띄며, 현재의 수연을 보고 있었다.
어색하지만 젊은 날의 수연을 마주 본 현재의 수연은 초라함을 느꼈다.
여전히 들판에 서서 바람을 느끼며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현재의 수연) "이곳은 어디예요. 당신은 누구세요."
현재의 수연이 물어보자, 젊은 날의 수연이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젊은 날의 수연) "여기 참 따뜻하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에요."
길을 잘못 들어섰다 생각한 수연은 뒤돌아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젊은 날의 수연이 현재의 수연 어깨를 붙잡았다.
(젊은 날의 수연) "잠깐만요. 제 얘기를 마저 듣고 가세요. 아직 여유 있어요."
현재의 수연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보다가 젊은 날의 수연을 빤히 쳐다봤다.
"그럴까요. 참 예뻐요. 이곳의 풍경도, 당신도 참 예쁘네요."
젊은 날의 수연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젊은 날의 수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다시 한번 선택할 수 있어요."
"무엇을요..."
힘 없이 어깨를 축 내리며 허리를 굽힌 현재의 수연.
손으로 무릎을 쓸어 만지며 다시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난,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었어요. 내 젊음도, 꿈도, 내 남편도, 사랑도."
수연은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오히려 홀가분함을 느꼈다.
"여기는 제가 죽기 직전에 머무는 곳인가요. 죽은 내 남편도 어쩌면 불안해하지 않겠네요."
(젊은 날의 수연)"이대로 그냥 보낼 건가요. 당신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네, 그래야죠.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몸으로, 이 세월로."
(젊은 날의 수연)"당신은... 왜..."
"... 네?"
(젊은 날의 수연)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란 말이야!"
젊은 수연은 다급하게 현재의 수연을 붙잡았다.
현재의 수연은 무서움을 느꼈다.
그런데 젊은 날의 수연의 눈에서 진실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절규를.
더 이상 가지 말라며, 젊은 날의 수연은 현재의 수연을 붙들며 설명을 하였다.
(젊은 날의 수연)"이젠 아니야, 너 자신을 위해 선택해.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야."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무섭네요..."
젊은 날의 수연은 주머니에서 황금빛 열쇠를 꺼내어 보여줬다.
열쇠는 반사되는 빛에 따라 황금빛을 머금은 채 빛나고 있었다.
(젊은 날의 수연) "이건 당신의 길을 열 수 있는 열쇠예요. 보이는 문을 따라 가요."
"이걸 왜 저한테..."
열쇠를 현재의 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순간, 수연 앞으로 황금빛의 문이 나타났다.
(젊은 날의 수연 )"당신이 선택한 그 문, 황금빛 문 앞이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요."
현재의 수연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날의 수연 )"그 문을 열면, 새로운 당신의 삶이 시작될 거예요."
"저... 저! 하나만, 하나만 물어볼게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그 사이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젊은 날의 수연은 서둘러 가라며 멀어지고 현재의 수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며칠 후가 지나자 수연은 점차 회복해 갔다.
그 사이에 수연의 가족들이 면회를 오고 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별다른 말이 없었다.
모두가 수연의 회복을 바라며 손을 맞잡았다.
며느리는 그 모습을 보며 곁에서 조용히 눈물을 닦고 있었다.
딸은 윤찬을 처음 보고 놀랬지만 수연의 곁을 지키며 간호하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모두들 윤찬을 보며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눈가가 촉촉한 윤찬은 수연을 걱정스럽게 지켰다.
"이제는 괜찮다니깐."
"천만다행이야. 깨어나줘서 고마워."
윤찬은 기력을 차린 수연을 보고 안심했지만, 더 이상 홀로 둘 수 없었다.
모두가 기뻐하며 안도하는 사이에 수연은 작은 결심을 품었다.
그녀는 매일 창가를 보며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고,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수연은 퇴원을 곧 앞두며, 윤찬에게 부탁했던 편지지와 봉투를 꺼냈다.
창가 근처에 앉아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먼저 가족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전체 편지 한 장, 나머지는 가족 일원에게 쓴 편지였다.
수연은 늦은 시간까지 편지를 봉투에 담아 병실 옆에 있는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윤찬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속 마음을 다 말하지 못하던 수연.
마지막으로 속 마음을 표현하는 건, 편지였다.
잠을 줄이며 편지를 쓰는 수연을 말려봤지만, 속 뜻을 알기에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가족들이 모두 병시에 모여 그녀의 퇴원을 도우며 짐을 챙기려 했다.
"엄마, 제가 차로 모실게요. 같이 나가요."
아들은 수연의 큰 짐 몇 가지를 들며 손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딸도 함께 거들며 얘기했다.
"그래요. 엄마, 우리가 다 준비했으니 집에 가서 함께 쉬어요."
그러나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곁에 있던 윤찬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수연의 손을 잡았다.
가족들은 놀란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수연은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다.
"엄마?"
"어머니?"
아들과 딸은 수연을 불러봤고, 며느리는 놀라며 다시 한번 수연을 불러 세웠다.
오히려 평온한 표정을 보인 수연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하나씩 나누었다.
가족 모두가 볼 수 있는 대표 편지는 아들에게 건네었다.
이 광경에 어리둥절한 가족들은 윤찬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오늘은... 나 혼자 가고 싶구나. 내 집으로."
"아니, 나와 함께 걸을 사람도 있고."
수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문을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꿈속에서 받은, 젊은 날의 수연이 건넨 황금빛 열쇠의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밝게 비친 햇살은 따뜻한 그림자를 보여줬다.
문턱을 넘자, 그들의 새로운 계절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