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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Sep 19. 2021

웨이트리스, 단

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12)



오른쪽 가슴에 Gogarty라는 하얀 글자가 새겨진 초록색 티셔츠. 우리가 floor staff임을 뜻하는 초록색 모자. 까만 바지 위에 늘 두르고 있어야 하는 초록색 앞치마. 그것들을 깔끔하게 챙겨 입고, 쉽게 풀리는 머리카락이 금세 또 모자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게끔 힘주어 묶고, 


‘자, 오늘도 또 시작이구나.’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메인바로 올라간다. 교대 시간에 맞춰 메인바로 들어가면, 비키나 프랭크가 우리에게 그날의 플롯이 담긴 봉투를 나눠주고, 각자가 일할 곳을 일일이 지정해 준다. 누구 라운지. 누구 레프트뱅크. 누구 메인바. 단, 레프트뱅크. 


매일매일이 그렇게 시작되던 고갈티에서의 9개월. 


과연 내가 사는 동안, 그 9개월을 잊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긴 브레이크 타임이 주어지면, 시간이 맞는 아이들과 함께 밖에 나가 대충 먹을 만한 것들을 시켜놓고 절반쯤은 수다를 떨고, 절반쯤은 쓰러진 채 휴식을 취하곤 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우리끼리 마주 앉으면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그래서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수다에 끼는 걸 멈출 수 없던 그때의 그 시간들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내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는 내가 고갈티에서 일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단, 그곳은 나쁜 곳이야. 네가 그 일을 안 했으면 좋겠어.”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야.”

“그 펍은 불법적으로 일을 시키고 있잖아.”

“나한테는 주당 20시간 이상 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야. 하지만 20시간만 일해서는 제대로 먹고살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나도 고갈티의 불법을 이용하고 있는 거야.”

“시급이 20유로인 직장을 구하면? 그러면 넌 주당 20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살 수 있잖아."

“넌 내가 여기서 그런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해해.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아니, 너는 이해 못해.”

“……맞아, 난 이해 못해.”


일자리를 구하는 데 있어 언어의 장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모른다. 때문에 우리가 서로의 처지를 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는,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뜻하는,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 둘 모두가 잘 알고 있음을 뜻하는, 어색한 침묵이 잠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다.  


“단, 너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고갈티에는 나처럼 일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

“아니, 너는 진짜 용감해. 나라면 너처럼은 못했을 거야.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이해할 수 있어. 나도 내 나라를 떠나서 여기에 와 있으니까. 하지만 너처럼 잘 교육받은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하면서까지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 일. 그가 말하는, 웨이트리스의 일.


“그건, 여기에서 내가 예전보다 행복하기 때문이야.”

“그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야.” 

"......"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그의 눈에는 고갈티에서 일하고 있던 내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대체 행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오는 것일까. 


맥주를 서빙하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나는 더 행복했을까. 술 취한 손님들이 떨어뜨린, 깨진 맥주잔을 치우면서 나는 내 삶을 동정했을까. 언젠가는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펍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가 된 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정말로 나는, 고갈티에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곳에서의 기억은 왜 이렇게 선명하게 내 마음에 남았을까.  




일주일에 단 하루, 쉬는 날이 되면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것으로 그날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무심코 눈을 뜨면 창밖으로 저런 노을이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들. '단, 너는 여기서 행복하니?' 그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몰랐다. 하지만 그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나 애틋하게 남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때의 내 대답은 'yes'였나 보다. 



맥주는 다 똑같은 맥주인 줄 알았던 내가, 이제는 라거와 에일과 흑맥주와 밀맥주를 대충이라도 구별할 줄 안다. 다른 맥주는 마시지 않지만, 밀맥주만은 꽤 좋아해서 종종 냉장고에 쟁여 두기도 한다. 새로운 나라로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나라의 대표적인 맥주를 한두 종류씩 마셔보는 것은 고갈티에서 일한 이후에 생긴 습관이다. 맛을 온전히 구분하지는 못해도 보편적으로 유명한 화이트 와인 몇 종류와 레드 와인 몇 종류의 이름 정도는 댈 수 있다. 뭔가 축하할 일이 있거나 특별한 날이 오면, ‘오늘은 이걸 마셔야겠어!’라고 말하게 되는 나만의 페이버릿 와인도 생겼다. 


대여섯 개의 드링크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테이블까지 가져다주는 웨이트리스들의 단아한 몸짓.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능숙하게 와인 오프너를 돌려 병마개를 빼어내는 우아한 두 손. 제각각의 다양한 음료에, 또 제각각의 다양한 재료를 섞어, 이름도 외기 힘든 수많은 칵테일들을 촤라락- 하고 만들어 내는 바텐더들의 그 마법 같은 움직임.  


나는 이제 그런 것들에 감탄할 줄 안다. 그 몸짓들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고단함도 안다. 고갈티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것들을 결코 삶에서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행복한 웨이트리스만은 아니었다. 엘렌은 웬만해서는 웃는 법이 없는 나를 두고 종종 ‘Serious Dan’이라고 불렀다. 


"다안~ 또 화났니?" 

"I’m not angry!"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좀 웃어!" 


툭하면 나를 놀리는 엘렌에게, 나 대신 나를 변호해 주는 것은 안나이다. 


"그녀는 화난 게 아니야. 그냥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그래그래, 사실 너희 둘은 거기서 거기지, 뭐."


심각한 바텐더, 안나. 심각한 웨이트리스, 단. 그리고 웃음을 터트리는 엘렌에게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어 보인다. ‘이상한 건 네가 이상한 거지. 고갈티에서 일하면서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면 엘렌은 she is crazy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갈티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나를 미치도록 만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바쁜 시간들이, 언제나 나를 압박하기만 해서, 나는 ‘즐기면서 일하는’ 사람 같은 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건대,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나’만큼이나, ‘웨이트리스로서의 나’도 좋아했다. ‘웨이트리스, 단’은 언어와 문자를 다루지 않고도, 내가 나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존재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할 줄 아는 건, 기껏해야 말이나 좀 늘어놓고, 글이나 좀 쓰는 그런 일들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갈티에서 아홉 달을 버틴 이후, 세상의 어느 도시에 나를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엔 내가 살아남겠구나- 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 자신을 조금 더 믿게 된다는 것은, 그리하여 세상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지. 


뭔가가 간절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굴 수도 있다는 자각. 몸으로 하는 건 다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재인식. 서른 해를 넘게 살고도 미처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 아마 웨이트리스 일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마지막까지도 그런 '나 자신'에 대해서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뭘 하고 싶어?라는 질문에, 가끔 나는 바텐더가 되면 어떨까- 생각을 한다. 그러면 마법 같은 솜씨로 정갈한 칵테일들을 만들어, 손님들 앞에 우아한 몸짓으로 그 칵테일들을 놓아줘야지. 물론, 내가 사는 동안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바에서 일을 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꿈을 꾸면서라도 여전히 '웨이트리스, 단'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고생스럽고 가장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내, 결국은 내가 더블린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그 아이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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