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블린의 웨이트리스 (11)
고갈티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프랭크에게서 쫓겨난 후, 버틀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갈티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야'
라든가
'우린 더 이상 널 원하지 않아.'
와 같은 말을 듣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게 사실이다. 축제 기간이 끝나자마자 내 스케줄 표는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고 이 말은 즉,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나와 함께 고갈티에 들어온 new girls (우리는 갓 고갈티에 들어온 웨이트리스들을 늘 이렇게 불렀다.) 중, 나보다 짧은 스케줄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최악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 스케줄 표를 참담한 성적표라도 되듯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고갈티에서 해고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new girl들이 하나둘 고갈티를 떠났고, 그렇게 열 명에 가깝던 우리들 중, 결국 나와 제니퍼와 라리사, 그리고 브루나만이 남았을 때 드디어 나 역시 주 5일 스케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쯤에 희정은 이미 고갈티를 그만두고 없었고, 미승 역시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고갈티에서 일하는 단 한 명의 한국인이었고, 단 한 명의 아시안 웨이트리스였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브라질이나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남아메리카에서 온 터였고, 때로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폴란드 같은 유럽 국가에서 온 아이들이 있거나 몇몇 아이리쉬 스태프들이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벽하지 않은 영어를 쓰는 일터에서 혼자 고립어를 쓴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단절감을 느끼게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제각각의 언어로 수다를 떠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하릴없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곤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다른 문화와 다른 가치관에 익숙한 그 아이들 속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조금은 외로웠다.
그렇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도,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늘 my favorite girl이라고 부른 건 멕시코에서 온 에더였다. 겨우 160cm가 될까 말까 한 나에게,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 달라고 부탁하면서
“단, 넌 키가 크잖아.”
라고 말하던 에더는, 그러니까 정말로 체구가 자그마한 아이였다. 때문에 무거운 그릇을 잘 들지도 못했고, 그걸 높은 곳에 올려놓아야 할 때도 종종 손을 보태주어야 했다. 또한 영어 실력도 많이 부족한 편이라 매니저들은 에더와 일하는 걸 조금 답답해하기도 했다.
팍팍한 하루하루 속에서도 위로가 되던 사람들과의 시간. 그렇게 나는 고갈티에서도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지만 함께 일하는 우리들은 모두 다 그녀를 좋아했다. 에더는 갓 고갈티에 들어와 모르는 것도 많고 그래서 실수도 많은 우리가 조르륵 달려가 도움을 청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웨이트리스였다. 그녀는 우리보다 고작 2주 먼저 고갈티에 들어왔으면서도, 우리가 뭔가를 물어보거나 부탁을 하면 싫은 내색도, 귀찮아하는 내색도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우리를 도와주었다.
해도 티 안 나는 일, 손대기 지저분한 일,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을 손수 하던 것도 언제나 에더였다. 그래서 나는 에더와 일하는 걸 좋아했고, 에더 역시 언제부턴가 출근을 하면 나부터 찾아왔다. 우리가 new girl로 불리던 그 당시, 나와 에더는 하루라도 같은 장소에서 일하지 않는 날이 있으면
"에더,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난 네가 필요하단 말이야!"
라고 나는 투정을 부렸고
"단, 어제 네가 없어서 나 되게 너 그리웠잖아."
라고 에더 역시 다정하게 말하곤 했다.
그런 에더와 달리, 라리사와 친해지는 데는 얼마쯤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같은 시기에 고갈티에 들어왔지만, 내가 늘 메인바 담당이었다면 그녀는 늘 레프트뱅크 담당이었기에 이상하리만큼 함께 일할 기회가 없었다. 라리사는 처음부터 일을 곧잘 해냈지만, 나는 처음 두 달 간 수많은 실수를 해대던 문제아이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점점 일에 익숙해지고, 그래서 고갈티에서 가장 긴 근무표를 받는 스태프가 되었을 때 또 나만큼이나 일을 많이 해야 했던 스태프가 라리사였다. 그다지 가깝지 않던 우리가 서로를 ‘Poor Dan’, ‘Poor Lari’라고 부르며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어렸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웠다. 나는 까다로운 손님들 앞에서, 무례한 매니저들 앞에서, 끔찍하리만큼 긴 스케줄 앞에서, 늘 화를 내고 견딜 수 없어했지만, 라리사는 늘 침착했고 놀라울 정도의 참을성을 보였으며 결코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었다.
평범한 주중 오후라, 원래는 다섯 명의 웨이트리스가 있어야 하는 레프트뱅크에, 그날은 나와 라리사 두 사람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수많은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레프트뱅크의 모든 테이블이 꽉 찼고, 우리는 평상시보다 2.5배 많은 테이블을 각자가 감당해야만 했다. 때문에 나는 패닉에 사로잡혔건만, 라리사는 자신과 함께 있는 웨이트리스가 다름 아닌 나라는 걸 확인한 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좋아, 단. 너하고 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 차분한 다짐에는 '그래, 그녀의 말이 맞을 거야.'라고 믿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큰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면, 나와 라리는 그야말로 완벽한 팀을 이루었고, 그렇게 믿을 수 없도록 정신없던 날도 결국은 잘 넘길 수 있었다.
아마도 그 해 7월쯤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의 고갈티가, 우리가 알던 최악의 고갈티였다. 그날 나는, 벌써 두 달째 일주일에 하루밖에 쉬지 못하고 있었고 오픈부터 마감까지 일을 하는 날도 많았고 그래서 ‘오늘은 정말 마감까지 일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을 해도, 프랭크는 늘 자신과 함께 마감을 하는 멤버로 나와 라리사를 선택했다. 그런 프랭크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러 내려 간 사이 결국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라리사는 그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단, 괜찮아. 곧 이 모든 게 끝날 거야."
라고 말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위로하면 '그래도 화가 난다고!'라며 불평을 늘어놓았을 테지만, 라리사가 위로를 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맞아, 라리. 네 말이 맞아. 네 말이 맞을 거야.
실제로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나와 라리사는, 같은 날 고갈티에 들어온 것처럼 또 같은 날 같은 시간, 고갈티를 떠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어도, 내가 늘 고마움을 품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앤디는 내가 일을 못하던 때도 나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없던 바텐더였다. 그는 늘 내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언제나 젠틀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앤디가 꽤 잔실수가 많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와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매니저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던 어느 날, 대신 그 모든 책임을 지고 마감을 해야 했던 앤디가 갑자기 훌쩍 바를 뛰어넘더니 내게로 다가온 저녁이 있었다.
"단, 내가 믿는 유일한 floor staff가 너야. 혹시 다른 웨이트리스들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네가 좀 돌봐줄 수 있어?"
앤디는, 자신이 혹시 이 거대한 펍을 제대로 마감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동안 이곳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주 담당인 라운지에 갑자기 손님이 많아지면 프랭크를 찾아와 다른 웨이트리스 대신 단을 보내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곤 하던 앤디가 생각났다. 내가 와인병을 잘 따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내 테이블의 손님이 와인을 주문하면 늘 슬쩍 자기가 미리 병을 따서 건네주곤 하던 앤디도 생각났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앤디를 위해서라면 오늘은 기꺼이 마감까지 해도 좋다고 생각을 했다. 그것이 한 번도 나에게 무례한 적 없던 앤디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더블린을 떠나기 전, 러시아에 온 다샤에게서 받은 편지. 비록 그녀는 고갈티를 향해, 시원하게 욕을 날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외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나를 늘 little Dan이라고 부르던 고마운 아리안느.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 나를 늘 미소 짓게 만들어주던 아름다운 스테파니. 나를 밖에서 만날 때마다 '한국 여자의 패션 센스란!'이라며 말도 안 되는 찬사를 보내곤 하던 다정한 제시. '단은 초능력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저 비좁은 메인바를 휙휙휙 빠르게도 비집고 다닌다니까.'라며, 내 흉내를 내곤 하던 모니끄.
그러니까, 그곳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서 가끔 고갈티는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싫어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그곳에서 힘이 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고갈티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은 ‘그 사람들’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