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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04. 2017

Madrid. 그래도, 마드리드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하나. 스페인, 마드리드 (2)


  

마드리드를 찾은 지 닷새째 되던 날, 나와 제이는 드디어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마요르카(Real Mallorca)의 경기를 보기 위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향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홈 경기장에서 직접 보겠다는 건 스페인 여행을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계획한 일이었다.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된 것이 이 팀 때문이었으니, 이 도시에 왔을 때 이 팀을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마드리드의 시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처음 봤을 땐,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축구가 삶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어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축구가 아직 일상이 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살다 보니, '축구팬'이 '시민'과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 얼마쯤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가 경기장에 도착한 건 경기 시작이 세 시간이나 남아있을 때였다. 전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투어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느긋하게 경기장을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경기 시작 세 시간 전에는 그곳이 한산할 거라 여긴 내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후 네 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역을 빠져나왔을 때 내가 마주친 건 흥겨운 나팔 소리와 벌써부터 설렘이 느껴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 경기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동서남북 어디로 눈을 돌려 보아도 보이는 것은 모두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아이들은 흥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누군가 흥얼거리는 레알 마드리드의 응원 곡은 곧이어 모르는 이들도 다 함께 부르는 노래로 번져 나갔다. 그렇게 모여든 인파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결국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자 경찰들이 나타나 인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한 출입구 앞에 유난스레 많은 팬들이 모여 있어 그곳이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버스가 들어가는 곳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인파를 통제하는 움직임도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사람들은 경찰의 손짓에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쉽게 자리를 뜨진 않았다. 결국 양쪽으로 갈라선 사람들은 겹겹이 줄을 만들어 섰고 그 사이 텅 빈 도로 위로 네 마리 말 위에 올라탄 경찰들만이 오고 갈 뿐이었다.


흥겨움이 절정에 이른 것은 당연히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경기장 안에서였다. 10만 5000석에 달하는 관중석이 순식간에 꽉 차는 모습은 바라보는 나로 하여금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사람들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경기장을 채웠고, 또한 놀라울 만큼 질서 있게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 경기에서는 무려 일곱 골이 터졌다. 레알 마요르카 쪽에서 세 골, 레알 마드리드에서 네 골. 그러니까 경기가 끝났을 땐, 일곱 골이나 터지는 명승부를 본 기쁨에 들떠, 그보다도 더 라울(Raul Gonzalez Blanco)의 골과 도움을 실제로 보았다는 환희에 들떠, 라울의 응원 곡을 흥얼거리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4-3의 통쾌한 승리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매우 조용하고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마치 이것이 매주 당연하게 반복되는 자신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경기장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직전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은은한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서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보였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웅장함을 느끼게 할 만큼 거대한 벽을 쌓아놓지도 않았고, 위압감을 느끼게 할 만큼 화려한 외경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저 둥근 경기장 하나가 태초부터 이 도시에 존재해 왔다는 듯, 도심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처음엔 그 모습이 얼마쯤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다시 한번 바라보니 그 모습이야말로 마드리드라는 이 도시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이 경기장이야말로, 수많은 마드리드 사람들의 꿈과 휴식, 기쁨과 탄식, 열정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긴 곳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그곳에는 나의 꿈도 담겨 있었다. 축구팬이 된 이후 오랫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동경해 왔다. 라울 곤잘레스와 호세 마리아 구티(Jose Maria Gutierrez)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은 늘 나를 들뜨게 했고 그래서 결국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다. 그렇게 어렵게 만났기에 지금 이렇게 돌아서면 다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레알 마드리드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다시 만나는 데는 생각했던 것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 날로부터 채 3년이 흐르기 전에, 나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마드리드를 찾았으며 레알 마드리드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만났으니 말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팔고 있는 하몬 바게트. 스페인 사람들은 저 하몬을 어디서나 즐겨 먹는다.


이쯤에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하면 떠오르는 냄새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푸른 잔디의 싱그러운 냄새라든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의 땀 냄새 같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꽉 채운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씩 손에 들고 있던 하몬(Jamon)과 해바라기씨의 냄새가 냄새이다.


하몬이란, 훈제하지 않은 햄으로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건조한 음식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하몬을 무척 즐겨 먹어서 시장이든 마트든 음식을 파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돼지 뒷다리가 걸려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하몬의 인기는 축구장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하프타임이 되자 사람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하몬을 끼워 넣어 만든 샌드위치나 바게트를 여기저기서 먹어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해바라기 씨를 까 입에 넣고 있었는데 하몬 냄새에 해바라기 씨 냄새까지 섞이자 꽤나 곤혹스러운 냄새가 되어버렸다.


비록 나는 이 두 가지 음식 모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스페인 그 자체는 찬란한 햇빛과 비옥한 농토를 토대로 다양한 요리가 발달한 나라이다. 무어인이 수 세기 동안 스페인에 머물렀기에 그들의 전통 관습이 요리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하지만 유태인이나 무슬림과는 달리 육식의 전통이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스페인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가 바로 올리브기름인데, 스페인에서만 세계 전체 올리브의 44%가 생산된다고 한다.  





스페인의 대표적 요리 중 하나인 파에야.


스페인의 대표적인 요리로는 스페인식 철판볶음밥 정도로 볼 수 있는 ‘파에야(Paella)’가 있다. 철판 위에 밥과 콩, 고기, 해산물 등을 넣고 향신료인 사프란을 첨가하여 만든 요리이다. 사프란의 빛깔 때문에 밥알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이 이 음식의 특징이다. 파에야는 이미 대중화되어 스페인 어디에서나 비교적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데, 한국처럼 밥을 지은 후에 볶는 것이 아니라 생쌀을 넣고 볶기 때문에 그 밥맛이 한국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몬도, 해바라기 씨도 그리고 이 파에야도 사로잡지 못했던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스페인 요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타파스(Tapas)’였다. 타파스란 ‘채우다’ 또는 ‘덮다’라는 뜻을 가진 Tapar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것은 특정한 한 음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식욕을 돋우어 주는 애피타이저의 일종을 총칭하는 말이다. 원래는 파리가 술잔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그 위에 빵 한 조각을 올려놓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 빵 위에 간단한 안주거리를 얹어주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고 결국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빵 위에 올려놓지 않고 작은 접시 등에 내놓는 타파스도 많이 있다.  




술안주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 양은 작은 접시 정도 되지만, 두세 가지의 타파스를 한 접시 두 접시 먹다 보면 한 끼 식사를 대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흔히 스페인 사람들을 두고 하루 다섯 끼를 먹는 대식가라고들 하는데, 이 타파스가 바로 그들로 하여금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식사를 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스페인에는 이 타파스를 전문으로 하는 타파스 바(Tapas Bar)가 많이 있으니,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면 반드시 이 타파스 바에 한 번쯤은 들어가 보도록 하자.


단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을 위해서는 추로스(Churros)가 기다리고 있다. 추로스란, 길쭉한 모양의 튀긴 빵으로 좀 더 쉽게는 도넛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빵을 아주 진하고 걸쭉한 코코아에 찍어 아침식사로 먹는다고 하는데, 한국인들에게는 간식거리로 딱 제격이다.





스페인의 전통주, 상그리아


스페인의 전통주를 마시고 싶다면 상그리아(Sangria)를 한 번 마셔보길 권한다. 상그리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통음료로 피를 뜻하는 스페인어 ‘sangre’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레드 와인에 다양한 과일들과 탄산수, 설탕 등을 넣어서 만든 와인이다.




그렇게 마드리드에서 타파스와 상그리아를 즐기고, 부엔 레티로 공원에서 낮잠을 자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축구를 보고, 프라도에서 고야와 벨라스케스를 만나는 동안 어느덧 마드리드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당연히 여행은 충분하지 않았고,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여행의 끝을 축복하기 위해 플라멩코(flamenco)를 직접 보러 가기로 했다.


플라멩코는 집시들과 무어인, 그리고 유대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시작된 스페인의 민족 예술이다. 즉,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된 스페인에서 박해받았던 이들의 한이 담겨 있는 예술인 것이다. 플라멩코는 '춤'을 일컫는 바일레(Baile), '기타 연주'를 가리키는 토케(Toque), 그리고 '노래'를 뜻하는 칸테(Cante)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플라멩코 고유의 박수 소리인 팔마스(Palmas)와 타악기가 등장하므로, 공연자가 부추기지 않는 한 플라멩코 도중 손장단을 맞추는 건 삼가야 한다. 리듬이 매우 중요한 예술인만큼 잘 모르는 사람의 손장단은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지금은 스페인 각지에 있는 타블라오(Tablao. 플라멩코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플라멩코를 즐길 수 있다.


나와 제이는 마드리드에 있는 타블라오를 몇 군데 검색해 본 후, 라 그란비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타블라오에 가기로 했다. 공연 시간은 타블라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21:00부터 시작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관광 시즌에는 사람이 많이 몰릴 수 있으므로 미리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마드리드의 타블라오에서는 기타리스트와 가수, 몇 명의 무용수들이 무대에 앉아서 한 사람씩 나와 춤을 추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크아도로라는 형식의 쇼를 최초로 선보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 무대도 바로 이런 형식이었다. 24:00 경이되면 피구라라고 불리는, 최고의 배우가 등장하는 옛 형식을 고수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나의 도시, 마드리드


그렇게 플라멩코까지 즐기고 나자, 이제 정말 마드리드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사실 마드리드는, 한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이고 또 가장 여러 번 찾아간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첫 여행에서 일주일간 짧게 머물렀던 마드리드로 돌아간 건 그로부터 2년 10개월이 지난 후이다. 두 번째 스페인 여행의 주된 여행지는 안달루시아 지방이었지만, 그때도 나와 제이는 2주간의 안달루시아 여행을 끝낸 후 굳이 다시 마드리드에 들렀다. 그리고 우습게도, 마드리드에 도착하자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안달루시아는 나에게 낯선 타국이고 마드리드는 그렇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바르셀로나나 톨레도나 안달루시아의 여러 도시들이 마드리드보다 덜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스페인을 여행하며 그라나다 같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론다 같은 도시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나다와 론다가 아름다워도, 바르셀로나가 많은 것을 보여 주어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스페인의 도시는 그래도 마드리드였다. 그러니까 내가 또 한 번 스페인을 찾게 된다면, 그때도 내가 돌아갈 도시는 분명히 마드리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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