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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05. 2017

Lisboa. 리스보아에 눌러앉기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둘. 포르투갈, 리스본 (1)



우리는 보통 이 도시를 리스본이라고 부르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리스보아(Lisboa)라고 부른다. 영어식 표기로 부르는 것이 편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도시를 리스보아라고 부르는 쪽을 더 좋아한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포르투갈의 수도를 '리스보아'라고 부르도록 하자. 




리스보아로 향한 것은, 2주간의 안달루시아 여행을 끝낸 후였다. 어디서든 오래 머물고, 여유롭게 지내고, 게으르게 옮겨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안달루시아 여행을 할 때는 보고 싶은 도시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조금 바삐 지냈다. 때문에 그 여행을 끝냈을 때는 다시 게으른 여행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와 제이가 포르투갈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Porto)나 파루(Faro) 등으로 옮겨가지 않고 리스보아에서만 7박 8일 동안 머무른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때는 게을러질 여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리스보아는, 여행자가 게을러지기에 꽤 적당한 도시였다.


마드리드에서 리스보아까지는 버스로 꼭 7시간 30분이 걸렸다. 밤 10시에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타서 리스보아의 세테 리오스(Lisboa Sete Rios) 터미널에 내린 것은 새벽 5시 30분. 새벽에 새로운 여행지에 떨어진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이 되었다. 말 그대로 포르투갈은 내게 처음 와 보는 이국이었고 또 그곳의 사람들은 스페인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더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때문에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하철역을 찾아가 보았지만, 지하철은 몇십 분을 더 기다려야 운행을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와 제이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해 둔 숙소가 있는 폼발 후작 광장(Marquis of Pombal Square)으로 향했다.


하지만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새벽 여섯 시에는 어떤 여행자에게도 문을 열어줄 의향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를 그 모든 짐들과 함께 호스텔 앞에 세워두고 혼자 주위를 돌아보고 온 제이가, 얼마쯤 떨어진 곳에 베이커리가 하나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베이커리도 아직 문은 닫혀 있었지만, 오픈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아 곧 문이 열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여 우리는 그 가게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어서 문을 열지 못하겠니?’라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그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십여분이 지난 후에야 가게는 드디어 우리를 향해 문을 열어 주었다.





새벽의 리스보아에서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준 베이커리


이른 아침 식사로, 스페인에서보다 훨씬 더 진해 보이는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와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어!'라고 소리치는 우리의 위를 위하여 몇 가지 빵을 시킨 놓은 후 자리에 앉았다. 9월 중순이었음에도 그때의 나는 꽤 추웠던가 보다. 사진 속의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영수증을 보고 있다.


그렇게 베이커리에서 두어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숙소로 돌아가니 드디어 그곳의 문도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른 체크인 같은 건 허락되지 않아 우리는 짐을 맡겨놓고, 간단하게 세수만 한 후 다시 리스보아의 거리로 나왔다.


여담으로 리스보아는 좋은 호스텔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이다. 세계에서 Top 10에 드는 호스텔 중 3~4곳이 리스보아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둘러보면 꽤 괜찮은 호스텔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고, 우리 역시 마드리드에 비하면 더 저렴하고,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게다가 아침도 꽤 정성스럽게 준비해놓은 호스텔에서 머물 수 있었다.




리스보아의 돌바닥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들


야간 버스를 타고 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여행을 하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리스보아는 걷는 재미가 있는 도시였다. 흔히 리스보아를 일곱 개의 언덕을 가진 도시라고 하는데, 실은 그보다도 더 많은 수의 언덕들이 리스보아에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도시에는 오르막길도 많고 내리막길도 많고 거리거리 굽이치는 골목도 많다. 게다가 도시 전체의 거리가 아스팔트가 아닌 돌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돌바닥에는 다양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놀랍게도 이 모든 문양들은 하나하나 다 수작업으로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한다. 그러니 이런 문양들과 골목들을 구경하다 보면, 리스보아에서는 지루해질 틈이 없다.




리스보아의 내리막길

  

포르투갈은 원래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다가, 716년부터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다 1143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독립한 포르투갈 국왕 아폰소 1세가 리스본을 해방시켰다. 1249년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이란 의미로,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가 완료되었고, 이후 남부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13세기 중엽부터는 리스보아가 코임브라(Coimbra)를 대신하여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었다.


리스보아는 유럽에서도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드넓은 테주 강(River Tejo)을 끼고 있는 천혜의 항구이다. 테주 강은 스페인어로는 타호 강(Tajo)이라고 불리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길고 넓은 강이다. 총연장이 1,038Km나 되는데 이 중 716km는 스페인, 47km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을 흐르며 나머지 275km가 포르투갈을 흘러 리스보아에 이르고 다시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그 크기가 너무나 광대하기 때문에 강이라는 것을 알고 보아도 바다로 보인다. 때문에 리스보아는 오래전부터 지중해와 북해를 잇는 중개 무역항으로 발달하였다.




바이샤 지구의 호시우 광장


리스보아는 총 여섯 개의 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는 이 도시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바이샤(Baixa) 지구'이다. 바이샤 지구에는 두 개의 유명한 광장이 있다. 하나는 '공동의 광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호시우(Rossio) 광장,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호시우 광장보다 훨씬 더 넓은 코메르시우 광장(Comercio)이다. 호시우 광장은 13세기부터 리스보아의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으로 지금도 이 광장 주변의 거리가 리스보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이 거리의 남쪽 끝에는 '승리의 아치(Rua Augusta Arch)'문이 서 있다. 개선문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1755년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 이후, 도시를 재건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것이 바로 테주 강 쪽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는 코메르시우 광장이다. 이 광장 한가운데는 늠름한 모습을 한 돈 호세(Don Jose) 1세의 기마상이 테주 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은 본래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궁전 광장이라고도 불렸다. 리베이라 궁전은 약 250년 동안 포르투갈 군주들의 주거지 역할을 했던 곳인데, 리스본 대지진 때 붕괴되었다. 이후 이 궁전은 재건되지 않았고, 지금은 코메르시우 광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개선문과 돈 호세 1세의 동상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구경거리는 테주 강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4월 25일 다리'이다. 이 다리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Golden-gate Bridge)와 매우 흡사한데, 실제로는 샌프란시스코 - 오클랜드 베이 브리지를 건설한 아메리칸 브리지 컴퍼니(American Bridge Company)가 1966년 완공한 다리라고 한다. 세계에서 23번째로 긴 현수교라고 하는데, 버스를 타고 이 다리를 건너보면 이 다리가 얼마나 긴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다. (정말이지 한참을 달리고 달려도 다리가 끝나지 않는다.)


원래는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의 이름을 따서 '살라자르 다리'로 불렸지만, '리스보아의 봄'이라고도 불리는 4월 25일 혁명 이후 그 이름이 바뀌었다. 


4월 25일 혁명은 1974년 4월 25일에 발생한 포르투갈의 무혈 혁명이다. 이 혁명은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 정권인 살라자르 정권과 계속되는 식민지와의 전쟁에 대한 반발감으로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하여 발생하였다.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 의사를 표시한 이유로 '카네이션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이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정권은 군부의 과도 정부를 거쳐 투표에 의한 민간 정부로 이양되었다. 살라자르 정권이 물러간 이후 이 다리의 이름 또한 '4월 25일 다리'로 바뀌었다.

  




바이샤 지구를 둘러보는 일은 리스보아에 도착한 이후, 대부분의 여행자가 처음 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아마도 벨렝(Belem) 지구가 아닐까 싶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벨렝 지구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로니무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과 과거 리스본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감시하던 벨렝 탑(Tower of Belem), 그리고 엔히크 항해왕자의 사망 500주년을 기념해 지은 발견 기념탑 등이 있다.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이 벨렝 지구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내려와 15번 트램을 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포르투갈 건축 예술의 백미라 불리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포르투갈 황금기 때의 왕, 마누엘 1세가 항해 왕자 엔리케의 위업을 기리는 동시에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 개척을 기념하기 위해 착공한 건물이다. 하지만 준공이 끝나기 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후에는 이를 감사하는 건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바스코 다 가마의 유골은 지금도 이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중앙 정원


이 수도원은 밖에서 보면 매우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중후한 우아함이 느껴진다. 10유로라는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볼 것 많은 곳이지만, 그중에서도 중앙 정원을 이곳의 하이라이트라고 말할 수 있다. 사방은 수도원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위는 하늘을 향해 탁 트여 있는 이 중앙 정원에서는 마치 공원에서처럼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사실 리스보아에 있는 동안,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이 날만은 햇볕도 너무나 좋아서 중앙 정원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테주 강의 귀부인이라 불리는 벨렝 탑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나와서 육교만 건너면 벨렝 탑까지 갈 수 있다. 1515~1521년에 건설된 이 벨렝 탑은 물속에 앉은 나비와 같다고 하여, '테주 강의 귀부인'이라 불린다. 현재 이 벨렝 탑은 물속에 있지 않지만,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물속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1층에는 물이 차올랐다가 빠졌다가 했는데, 그 부분은 정치범의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발견 기념비를 향해 걸어가는 중. 저 멀리 발견 기념비와 4월 25일 다리가 함께 보인다.


벨렝 탑에서 100~200m만 걸어가면 발견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이 기념비는 포르투갈의 영웅, 엔히크 항해왕자의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여 1960년에 세워졌다. 기념탑이 있는 자리는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라고 한다. 발견 기념비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의 선원들과 그들의 후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로, 항해 중인 범선 모양을 하고 있다. 제일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해상왕 엔히크, 그 뒤로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연 데 공이 큰 모험가와 항해가, 지도 제작자, 천문학자, 선교사 등이 따르고 있다.


'항해왕자'라 불리는 엔히크(1394~1460)는, 국토의 면적은 좁고 바다에 접한 면적은 넓은 포르투갈이 바다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인물이라고 한다.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고, 그곳을 중계무역에 활용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엔히크는 언제나 더 넓은 바다를 원했다. 결국 적도를 넘어 세네갈에 도착하였고 이후에도 카보 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도달하였다. 엔히크의 이러한 활동이 후에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비록 엔히크 왕자가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은 없지만, 이러한 업적에 힘입어 해상 왕자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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